옛 친구가 설계한 ‘꽃뱀 각본’ 덥석
지금까지 알려진 피해자는 3명이지만 경찰은 이들 3명 외에도 피해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피해자들이 자신들도 불법도박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피해사실을 밝히는 걸 꺼리고 있는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전국을 누비며 옛 친구들을 울린 사기 도박단의 발자국을 따라가봤다.
“영재야! 나다 인호. 우리 한번 만나자.”
지난해 12월경 이영재 씨(가명·47)는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친구 최인호 씨(가명·47)에게서 갑작스런 전화를 받았다. 최 씨는 30여 년간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이 씨의 고향친구였다. 이 씨로서는 어릴 적 친구였던 최 씨의 전화가 반가울 따름.
이 씨는 충북 청원군의 한 식당에서 최 씨와 30년 만에 재회를 했다. 최 씨는 “나이를 먹고 보니 문득 옛 친구들이 떠올라 수소문 끝에 연락했다”며 오랜만에 연락한 배경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날 최 씨와 만나는 자리에서 이 씨에게 뜻밖의 좋은 일(?)이 생겼다. 옛 친구와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업’돼 있었는데 아리따운 여인들까지 ‘작업’을 걸어왔던 것. 문영선 씨(가명·57) 등 미모의 여인 3명이 이 씨에게 다가와 “○○에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냐”고 말을 붙이더니 그 자리에서 “같이 놀자”고 해 합석까지 하게 된 것. 이것이 계기가 돼 이 씨와 문 씨는 금세 깊은 관계로 발전했고 그 뒤로도 이들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문 씨와 여성 2명은 여느 때처럼 “밥이나 먹자”며 이 씨를 식당으로 불러냈고 이 자리에서 문 씨는 이 씨에게 “심심한데 밥값내기 고스톱이나 치자”고 제안했다. 푼돈의 밥값내기 고스톱이라 이 씨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문 씨가 “우리끼리만 노니까 재미가 없다. 그때 만났던 그 오빠도 불러서 같이 놀자”고 최 씨를 부를 것을 제안했다. 연락을 받은 최 씨는 자신의 일행 2명을 더 데리고 와 합류했다. 사람이 여럿 모이다보니 도박판은 점차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리고 얼마 안가 최 씨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잃었다. 최 씨는 돈을 잃을 때마다 자금을 공급해 줄 사람들을 불렀는데 마지막엔 도박멤버들이 총 12명에 이르렀다. 이 씨 역시 ‘올인’이 될 때마다 다음날 은행계좌로 부쳐주는 조건으로 최 씨가 부른 사람들한테서 돈을 빌렸다고 한다.
이들이 벌인 도박은 일명 ‘월남뽕’. 12장의 화투를 두 장씩 엎어놓고 돈을 건 뒤 뒤집었을 때 가장 높은 숫자에 돈을 건 사람이 돈을 가져가는 방식의 게임이다. 첫날 게임은 본전치기 정도였지만 이후에 이 씨와 최 씨는 점차 돈을 잃어갔다. 이 씨와 최 씨가 본전을 찾기 위해 도박판에 뛰어든 것이 그 뒤로 총 다섯 차례.
이렇게 해서 이 씨가 도박판에서 잃은 돈은 무려 2억 원. 최 씨도 수 억여 원을 잃었다고 한다. 종국에 보니 돈을 잃은 것은 이 씨와 최 씨뿐이었다. 게다가 곰살맞게 굴던 문 씨까지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다. 꼼짝없이 사기도박에 당한 모양새였다.
충북지방경찰청 수사계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이 씨의 친구들에 의해서다. “이 씨가 꽃뱀 사기 도박단에 당한 것 같다”는 얘기가 이 씨의 지인들 사이에서 퍼지면서 경찰이 알게 됐던 것.
경찰이 수사에 착수해 곧바로 이들을 검거했지만 혐의를 입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경찰이 이들 도박단 일당을 입건한 시점은 지난 2월 5일. 이들이 모두 구속된 시점은 지난 6월 2일. 조사에만 무려 4개월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전국을 무대로 상습적인 사기행각을 벌여온 혼성 사기도박단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씨와 도박을 한 사람에서부터 돈을 빌려준 사람, 심지어 이 씨가 ‘함께 사기를 당한 피해자’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최 씨 역시 이들 일당과 한패였다고 경찰은 밝혔다.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옛 친구가 보고 싶어 우연히 찾게 됐다”는 최 씨의 말은 순전히 거짓으로 밝혀졌다. 사실은 이 씨가 고물상으로 돈을 좀 벌었다는 고향 친구들의 말을 듣고 범행을 모의한 뒤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시에 ○○식당에 이 씨를 데리고 갈 테니 ‘○○ 지역에 어떻게 가느냐’ 길을 물으며 접근하라”는 지시도 최 씨가 내린 것이었다고 한다.
최 씨는 경찰에서 “나도 피해자다”라고 일관되게 주장했고 이 씨 역시 최 씨를 옹호했다고 한다. 친구가 돈을 잃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이 씨로서는 최 씨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 씨의 마각은 금방 드러났다. 이 씨가 입금했던 돈 중 일부가 최 씨 통장으로 이체된 사실이 경찰의 계좌추적에서 밝혀진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가 도박에서 돈을 잃은 것은 일명 ‘탄화투’에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탄화투’란 미리 나올 패를 맞춰놓은 화투짝을 일컫는 것으로 이들은 이 씨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판돈이 몇 천만 원 이상일 때만 이것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아산 지역에서도 똑같은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였다. “부동산을 사려고 하는데 여기 시세가 어떤지 좀 알려달라”며 피해자에게 접근해 도박판으로 유인, 무려 2억 8000만여 원의 돈을 뜯어냈다고 한다. 이 피해자 역시 이들 일당 중 한 명과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들 일당은 꽃뱀 사기 행각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006년 4월 아산 지역에 살고 있는 A 씨는 앞서 이 씨를 울린 문 씨의 유혹에 홀려 여관에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성관계를 맺기 직전에 일당 중 한 명이 여관을 덮친 뒤 남편행세를 한 것. A 씨는 이들로부터 1억 5000만 원의 합의금을 요구받았지만 경찰에 곧장 신고한 덕에 금전적 피해를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편 이들 사기꾼들을 상대로 또 다른 사기를 치려던 간큰 사기꾼도 있었던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경찰은 브로커 박창동 씨(가명·57)를 이들 일당과 함께 구속했는데 박 씨는 사기도박단에 대한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브로커를 자처하며 이들에게 접근, “사건을 무마시켜 주겠다”며 이들한테서 600만 원을 뜯어낸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런데 박 씨도 사기도박단의 일당 중 한 명과 친구였다는 후문이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