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빚은 ‘낙원’ 속에 ‘지옥’도 있다
세상과 단절된 공동체 내에서 중세시대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힐데브란트 대가족. 사진출처=슈테른
2004년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빌리지>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 그 결말에 적잖게 놀랐을 것이다. 중세시대의 고요하고 한적한 마을에 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마을 주민들이 사실은 20세기와 단절된 채 일부 장로들의 속임수에 의해 숲 속에서 폐쇄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반전이 그것이었다.
볼리비아의 메노파 신도들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하지만 다른 점이라면 단지 그런 생활이 공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진해서 이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살고 있으며, 세상 밖의 일에도 관심이 없다. 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저 신의 뜻에 따라 17세기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사정이 이러니 주민들은 모두 현대 문명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고 쓰는 언어는 독일어의 방언 가운데 하나이자 중세 독일어인 ‘저지 독일어’다. 현재 표준어로 사용되고 있는 독일어는 고지 독일어로, 현재 독일어권에서도 저지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약 500만 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중세 독일어를 배우며, 그마저도 딱 성경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만 배운다. 스페인어나 수학, 지리 등은 전혀 배우지 않으며, 여자아이들은 초등학교 6학년까지, 그리고 사내아이들은 7학년까지만 다니고 졸업한다. 만약 학교를 더 다니고 싶은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 .이에 마을 학교 교사는 “안 된다. 원래 그래왔기 때문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마을 주민들은 음악도 안 듣고, 운동도 할 줄 모르며, 책도 읽지 않는다. 어린 아이들은 장난감이나 그 흔한 공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교통수단이라곤 마차가 전부이며, 대부분 말이나 소, 그리고 닭을 키우면서 생활하고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는 등유 램프를 사용하고 있으며, 포장도로가 없는 까닭에 길은 온통 흙바닥 천지다. 이웃 마을과의 거리는 자동차로도 여섯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왕래도 거의 없다. 그만큼 외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슈테른> 기자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과 나눈 대화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가령 “독일에서 왔습니다”라고 소개하자 “아, 그래요? 독일에도 소가 있나요?” “그럼 독일에서 여기까지는 버스를 타고 오셨나요?”라고 묻는 등 엉뚱한 질문을 했다.
아이삭 힐데브란트(52)는 아들 여덟과 딸 여섯 등 모두 14명의 자식을 두고 있는 대가족의 가장이다. 그는 말이나 소를 키우는 평범한 농부다. 하지만 마을에서 그가 하는 일은 그뿐이 아니다. 그는 필요하다면 치과 의사도 됐다가 안과 의사도 되는 등 만능 재주꾼(?)이다.
그렇다고 그가 전문의 자격증을 따거나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그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의사와 다를 바 없다. 그의 헛간에는 치과 진료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마을 주민들에게 2유로(약 2500원)씩을 받고 이를 뽑아주고 있다. 이 전체를 뽑아 줄 경우에는 송아지 한 마리를 받는다.
그의 생활 역시 다른 주민들처럼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긴 마찬가지다. 그는 <슈테른> 기자에게 “미국 대통령은 정말 흑인인가요?” “창녀란 직업이 정말 존재하나요?”라고 호기심 가득한 질문들을 던졌는가 하면, “몸속에 칩을 넣고 지금 우리를 촬영하고 있는 건가요?”라며 경계를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세상 밖의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요?”라는 질문에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시리아 사태는요?”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전쟁이요?”라고 놀라면서 “우리는 전쟁을 겪은 적이 없어요. 우리와 함께 여기서 살면 아무 것도 모르고 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될 거예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실제 그의 말처럼 이곳 주민들의 생활은 한적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아이들은 바깥에서 햇빛을 마음껏 쐬면서 맨발로 뛰어 다니며 놀고, 페이스북의 친구가 몇 명인지 세는 대신 밤하늘의 별이 몇 개인지를 센다. 또한 트위터 멘션을 날리는 대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다. 띠리링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도 없고, 부아앙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달리는 트럭도 없다. 오로지 주변에는 꼬꼬댁 거리는 닭들의 소리나 말발굽 소리만 고요하게 들린다.
[1] 아이들은 농장에서 매일 일손을 돕는다. 한 여자 아이가 소젖을 짜고 있다. [2] 예배 시간에 열렬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 주민들. [3] 인근 산타크루즈로 외출을 나간 메노파 공동체 여성들이 시내에서 현대식 옷차림의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 [4]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마차는 유일한 이동 수단이다. 사진출처=슈테른
농업공동체를 이뤄 생활하기 때문에 모두 다 같이 농작물을 수확하며,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힘을 합쳐 도와준다. 조금 나이가 든 소년들은 지역 협동농장에서 일하며, 직접 손으로 만든 치즈를 시장에 내다 판다. 돈 욕심도 없기 때문에 하루에 10유로(약 1만 원) 정도만 파는 것이 목표다. 사정이 이러니 돈 대신 소나 닭의 개수를 세는 데 더 익숙하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의 생활은 모두가 꿈꾸는 지상낙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고 <슈테른>은 지적했다.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생활을 견디다 못해 비행을 저지르는 청년들이 속출하고 있는가 하면, 이를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가는 이탈자들도 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아이들은 일요일 예배가 끝난 후에는 어른들 몰래 숲 속에 묻어 두었던 라디오를 꺼내 들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곳에서는 음악을 듣는 행위가 신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몰래 숨어서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다.
음악 대신 구형 세탁기의 기계음에 맞춰 춤을 추는 힐데브란트는 왜 음악을 듣지 않느냐는 질문에 “음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주교님 말씀이 음악을 들으면 지옥에서 불에 타 죽을 거라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한번은 아들 가운데 하나가 몰래 기타를 소지하고 있다가 발각된 적이 있었다. 이웃 주민이 이를 발견하고 주교에게 고자질하자 원로회의에 불려갔던 힐데브란트는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흠씬 두들겨 팼다.
이런 억압적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청년들도 있다. 그리고 급기야 몇 년 전에는 마니토바라는 마을에서 공동체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8명의 청년들이 무리를 지어 떠돌아 다니면서 100명이 넘는 부녀자를 성폭행한 것이다. 청년들은 소에게 사용하는 마취제를 사용해 부녀자들을 기절시킨 다음 성폭행했으며, 어린 소녀부터 유부녀까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희생양으로 삼았다.
하지만 주교는 이 청년들에게 마치 학교를 무단결석한 아이들에게 내리는 수준의 벌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시켰다. 잠시 마을에서 추방시켰다가 다시 사면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이에 보다 못한 볼리비아 정부가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조사 결과 근친상간 등 청년들의 추가 범행이 드러났고, 결국 가해자들은 2011년 25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사건으로 인해 메노파들의 억압적인 생활이 처음으로 신문 지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지만 지역 주민들은 피해자인 딸들을 병원에 보내지도 않았으며, 그저 모든 걸 잊고 살라며 다독이기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이 이러니 억압을 견디다 못해 공동체를 탈출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노이도르프 가족도 그런 경우였다. 여덟 명의 자녀들과 함께 공동체에서 도망쳐 나온 노이도르프는 비단 성폭행 사건 때문에 마을을 등졌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매일 같이 벌어지는 ‘정신적 테러’ 때문에 도망을 쳤다고 말했다. 노이도르프는 “폭력과 알코올 중독은 공동체의 심각한 문제다”라고 말하면서 “청년들은 해방구를 찾아 의식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이웃 마을의 볼리비아 청년들과 주먹질을 하면서 패싸움을 한다”라고 말했다.
마을에서 탈출한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노이도르프 가족도 처음에는 현대 문명에 익숙해지는 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정원 딸린 집에서 살면서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아이들은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으며, 부모는 아이들을 마음껏 껴안을 수 있다. 노이도르프 부인은 “처음에는 아이들을 포옹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군가를 껴안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볼리비아 동쪽에 위치한 치와와에는 현재 이렇게 메노파 공동체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스페인어를 배우고, 자동차를 운전하며, 음악을 듣고 축구를 한다. 먼저 탈출한 사람들은 나중에 탈출한 사람들에게 집과 일자리를 제공해 주면서 자립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준다. 대부분이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재활 치료를 받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현재 치와와 주민들은 볼리비아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한 상태다. 메노파 공동체 주민들이 의무적으로 스페인어를 비롯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메노파 공동체가 볼리비아 정부의 통제를 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메노파 주교는 “그렇게 하면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절대 외부 세계가 유입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디로 갈 생각이냐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던 주교는 “모르겠다. 더 이상 우리를 위한 곳이 지상에 남아 있을까. 혹시 아프리카? 아니면 우리 선조가 정착했던 우크라이나로 다시 갈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는 내전이 한창이라는 <슈테른> 기자의 말에 주교는 “아, 그래요?”라고 물으면서 의심스런 눈으로 기자를 바라봤다. 그는 그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메노파 500년 이주의 역사 가톨릭 박해 피해 네덜란드서 남미로…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결성된 메노파 단체가 이렇게 멀리 남미까지 이주해온 것은 가톨릭교회의 박해 때문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프리슬란트를 거쳐 프로이센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러시아를 거쳐 캐나다, 미국 등 북미에까지 도달했다. 북미 지역의 정부가 메노파 단체들에게도 영어 교육을 의무화하자 다시 멕시코로 이주했으며, 멕시코에서 타이어를 장착한 트랙터가 유입되면서 이웃 도시로 쉽게 이동이 가능해지자 다시 파라과이로 둥지를 옮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파라과이 마을에 전기와 도로가 연결되자 다시 세상을 등지고 현재의 볼리비아 마을로 이주했다. 현재 이들에게 볼리비아는 500년에 걸친 도주 역사의 임시 종착역이다. 20년 전 볼리비아로 이주해온 메노파 단체들은 현재 두랑고, 마니토바 등 주로 척박한 지역인 남동쪽에 모여 살고 있다. 이곳은 섭씨 40도를 웃도는 메마른 지대로 심한 가뭄이 반복돼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곳이다. 이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도주를 하는 이유는 더 이상 가톨릭의 억압과 박해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근대의 유혹’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