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컨 손에 쥐고 “5층까지 접수”
▲ 조폭 동원 영업방해 혐의를 받고 있는 대기업 임원 아들 이 씨가 운영하는 헬스장(3·4층) 간판. | ||
이 씨가 경찰에 구속됐지만 3개월여 동안 계속된 조폭들의 업무방해로 실내 골프연습장은 이미 회생불능의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골프장 주인 김 아무개 씨(44)는 “영화 <올드보이>에서 주인공이 당했던 것처럼 당했다”며 한탄했고 김 씨의 부인은 “<올드보이>는 어린시절 악연이라도 있었지만 우리는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당하기만 했다”고 울먹였다.
지난 2006년 12월 김 아무개 씨(44)는 대구 남구 대명동의 한 건물 5층에 실내골프장을 개설했다. 같은 건물 3·4층에는 11월 말부터 문제의 이 아무개 씨가 ‘팝스이탈리아짐’이라는 헬스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김 씨의 골프장은 불과 6개월도 안 돼 회원이 200명을 넘어서 한 달 수입만도 1억 원 가까이 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이 씨의 헬스장도 손님이 계속 늘어 한 달 정회원이 400여 명에 이를 만큼 성장했다.
이 두 가게는 처음에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협력관계’였다고 한다. 헬스장에 온 손님이 골프장에 등록할 경우 혹은 골프장 회원이 헬스장에 등록할 경우 서로 일정 금액을 할인해주는 등 상대의 영업활동을 돕는 등 ‘윈윈’하는 관계로 지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씨가 헬스장 전용 사우나를 만들려고 하면서 이들의 ‘공생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이들 두 가게가 위치해 있는 건물은 대구에서 입지조건이 좋은 건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때문에 사우나 시설을 할 만한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던 것. 결국 이 씨는 김 씨의 골프장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헬스장 전용 사우나를 만들 계획을 세우게 됐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자신이 평소 알고 지내던 조직폭력배 김 아무개 씨(26) 일당에게 2000여만 원을 주고 골프장을 몰아내줄 것을 부탁했다.
이들 조직폭력배 15명이 김 씨의 골프장에 등록한 것은 지난 4월 21일. 이들은 한 사람당 135만 원가량에 이르는 석 달치 회비 2000여만 원을 그 자리에서 수표로 지불하고 회원 등록을 했다고 한다. 김 씨는 처음 이들의 문신 등을 보고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거절할 만한 특별한 사유가 없었기 때문에 회원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부터 ‘악몽’은 시작됐다. 이후 이들 15명은 하루도 빠짐없이 골프장으로 ‘출근’했다. 골프연습장이 문을 여는 시간인 오전 10시경에 나타나 폐장시간인 저녁 12시까지 머물며 온갖 방법으로 김 씨 부부를 괴롭혔다고 한다. 아무 때나 욕설을 내뱉는 것은 기본이고 러닝셔츠만을 걸친 채 팔, 다리 등 온몸의 문신을 드러내며 골프채를 휘둘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가 하면 회원 등록을 하기 위해 상담하러 온 사람들에겐 등 뒤에서 노골적인 으름장을 놓으며 도망치다시피 나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골프장 내부의 간이식당에 나타나 메뉴에도 없는 된장찌개를 끓여달라고 떼를 썼고 반찬이 적다며 밥상을 엎어버리기도 했다.
김 씨는 골프장 내에 있는 자신의 개인 사무실도 일주일 만에 이들에게 내주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하루 종일 포커, 고스톱 등 도박판을 벌이자 김 씨가 궁여지책으로 “다른 회원들이 불편해하니 정 하고 싶으면 내 방에서 하라”며 방을 내줬다는 것.
조폭일당이 이렇게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자 200여 명에 이르던 회원은 단 두 달 만에 110명으로 줄어버렸다. 장부에만 살아있지 실제로는 발길을 끊은 6개월 이상의 장기회원을 제외하고나면 현재 김 씨의 가게에 남아있는 고정회원은 60여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김 씨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이 왜 자신의 가게에서 죽치고 앉아 행패를 부리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한다. 김 씨는 “석 달이 지난 뒤 회원 연장을 안해주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을 뿐 이들이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고의로 행패를 부리는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김 씨가 이들의 배후에 이 씨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지난 6월 말 경찰들의 방문을 받고나서였다고 한다. 그날 가게에 찾아온 형사 3명이 김 씨에게 “요즘 가게에서 괴롭히는 사람들 있지 않느냐”라며 김 씨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며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씨를 직접 대면한 적이 없던 김 씨는 그 사진 속의 인물이 헬스장 주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대기업 부회장의 아들”이라는 경찰의 설명을 듣고나서야 아래층 헬스장 주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것.
경찰이 이 씨의 범행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경찰에 붙잡힌 한 절도범의 진술이 단서가 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친구 한 명이 거액의 돈을 받고 골프장 주인을 괴롭히고 있다”는 절도범의 진술을 들은 경찰은 곧바로 내사에 들어가 문제의 골프장이 김 씨의 가게임을 밝혀내고 추가 조사에 들어가 조폭들의 배후가 이 씨임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들 조폭 일당이 헬스장에 건넨 수표 2000여만 원을 추적해 그 돈이 이 씨로부터 나왔음을 밝혀냈다. 또한 지난 5월경 이 씨가 ‘일을 잘하고 있다’며 이들 조폭들을 데리고 포항의 한 계곡에 가서 ‘파티’를 벌였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결국 지난 16일 이 씨와 조직폭력배 15명은 경찰에 구속됐다.
그렇다면 돈에 관해서는 부족할 것이 없는 대기업 부회장의 아들 이 씨가 조직폭력배들과는 어떻게 알게 됐을까. 주변 사람들은 이 씨가 대학교에 다닐 때 인연을 맺은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번에 구속된 이들 조폭 중 한 명이 이 씨의 대학교 후배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
서울 태생인 이 씨는 대구 G 대학교를 나왔고 이후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경찰에 따르면 검거된 일당은 이 씨를 모두 ‘형님’이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모셔왔다고 한다.
한편 이 씨는 여러 가지 정황과 자신이 수표까지 건넨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범행을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 씨가 “술자리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동생들에게 ‘우리 가게 위층에 헬스장 전용 사우나를 만들면 손님이 더 늘어날 것 같은데 스크린골프장 때문에 못하고 있다’고 말하자 동생들이 형님을 돕자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것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이 씨는 “김 씨에게는 도의적으로는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는 후문이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