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큰 백수들 ‘청와대도 물로 보였니’
하지만 특정 언론사 출신의 기자들이 얽혀 있는 탓에 이번 협박사건에 대해서 모두 쉬쉬하고 있을 뿐 이들이 편지를 받은 경위와 범행동기는 물론 범행사실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찰에서도 외부로 새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번 사건에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범인들은 왜 동아일보 퇴직 기자들을 콕 찍어서 협박편지를 보냈던 것일까. 그리고 겁도 없이 청와대 고위층 인사한테까지 보낸 이유는 뭘까.
지난 11월 17일 A 씨(68)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발신인도 없는 이 편지봉투에는 A 씨의 이름과 주소가 인쇄된 라벨만 붙어있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는 편지였다.
하지만 이 편지를 뜯어본 A 씨의 가족들은 이내 사색이 되고 말았다. 편지 속에는 용지에 ‘1억 원을 준비해서 ○○버스터미널로 나올 것.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가족들을 모두 죽이거나 얼굴에 염산을 뿌리겠다. 집에 불을 지를 수도 있다’는 내용의 협박글이 빼곡히 인쇄돼 있었던 것.
A 씨의 가족들은 편지를 받은 지 3일 후인 지난 11월 20일경 거주지 근처인 수서경찰서 형사과로 이 사실을 신고했다. 곧바로 수사에 착수한 수서경찰서 강력팀은 또 다른 경찰서에도 비슷한 내용의 신고가 접수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대문경찰서와 성북경찰서 등 산발적으로 몇 군데 경찰서에 접수된 사건 신고 중에서 발신인이 없는 협박편지를 받았다는, A 씨와 비슷한 내용의 신고가 5건이 더 있었던 것. 경찰 조사 결과 신고자들이 받은 협박편지는 모두 발신인이 없었고 안에는 모두 프린터로 인쇄된 똑같은 내용의 글이 담겨 있었다. 동일범의 소행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일범이라는 확신 외에는 범인을 특정화할 만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편지가 자필로 써 있지도 않았고 발신처도 불분명했던 것. 경찰 수사는 상당한 난항을 겪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협박편지를 받은 피해자들 모두 이렇다할 원한관계가 없다고 진술했다. 때문에 피해자들이 협박편지를 받게 된 이유도 분명치 않았고 편지를 보낸 것으로 짐작 가는 사람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며 “당시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사를 진행하던 경찰은 신고자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곧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고자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연령대도 다양해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편지의 수신인이 모두 동아일보 출신 퇴직 기자들이었다.
▲ 이동관 대변인 | ||
경찰은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동아일보에 원한을 가진 사람의 소행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지부진’하던 수사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은 협박편지가 발신된 우체국을 찾아내면서다. 수사를 진행하던 경찰은 협박편지가 서울시 은평구의 한 우체국에서 발신됐음을 확인하고 이 단서를 토대로 수사, 지난 11월 25일 범인 2명을 검거했다. 사건 발생 일주일 만의 일이다.
사건을 담당한 성북경찰서 강력1팀에 따르면 피의자는 이 아무개 씨(28)와 정 아무개 씨(28)로 전과가 전혀 없는 초범이었으며 이들은 중·고등학교 동창 사이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조사에서 피의자들은 지난 10월에 일어난 ‘무작위 공갈·협박 사건’을 TV에서 우연히 보고 범행을 모의했다고 진술했다.
‘무작위 공갈·협박 사건’은 지난 10월 20일 경기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개가를 올렸던 것으로 김 아무개 씨 등 2명이 공모해 지난 7월부터 10월까지 공직자들을 상대로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간통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갈취한 사건이다. 당시엔 범인들이 피해자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무작위로 전화를 걸었음에도 3700여 만 원의 돈을 송금받은 것으로 드러났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의 피의자들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에게 협박편지를 보내면 신고하지 않고 돈을 보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며 “하지만 이번엔 범인들에게 돈을 전달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범인들은 왜 굳이 동아일보 퇴직 기자들에게만 이런 협박 편지를 보냈을까.
경찰조사 결과 특별한 이유는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를 맡았던 성북경찰서 강력1팀장은 “무직자였던 피의자들은 돈을 노리고 범행을 모의하던 중 마침 전직 동아일보 기자들의 모임인 ‘동우회(東友會)’ 회원의 개인정보가 담긴 명단을 입수하게 돼 범행에 활용한 것”이라며 “특별히 동아일보나 피해자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 이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피의자들은 동아일보사의 사무직 직원이었던 B 씨로부터 ‘동우회’ 명단을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B 씨는 피의자 중 한 명의 누나로 ‘동우회’ 명부는 B 씨가 회사를 그만두기 훨씬 이전부터 집안에 보관해 왔던 것이라고 한다. B 씨의 동생이 집에 있던 동우회 명단을 범죄에 이용했을 뿐 B 씨가 범행에 가담한 것은 아니라는 후문이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