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화 한 켤레와 바꾼 여섯 목숨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교사발령을 받아 충청북도 중원군 동락초등학교에 부임한 김 씨는 그해 7월 6일 북한군이 동락초등학교까지 밀고 내려와 진을 치자 기지를 발휘했다. 김 씨는 “국군이 모두 철수했다”고 말해 적군을 안심시킨 후 학교에서 4km나 떨어져 있는 국군 매복 지점(가섭산 644고지)으로 달려가 적의 배치상황을 상세히 알렸다. 김 씨의 첩보를 전달받은 국군은 북한군이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던 다음날 오후 5시 기습공격을 개시했다. 국군은 400여 명의 소수 병력으로 북한군 2186명을 사살하고 132명을 생포하는 등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한국전사에도 나오는 유명한 ‘무극리 전투’다.
김 씨는 그 공을 인정받아 추후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태극 무공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3년 후 김 씨는 한 탈영병에 의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게 된다. 김 씨의 얘기는 몇 년 뒤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전쟁과 여교사>(1966)란 제목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은 김 씨의 죽음이 얽혀있는 한 탈영병의 일가족 살해사건이다.
▲ ‘무극리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전쟁과 여교사> 포스터. | ||
청년의 이름은 고봉수(가명·25). 절도 혐의로 육군교도소에서 6개월을 복역한 그는 그해 7월 만기출소한 인물로 군단 소속 11××야전공병단에 배속돼 근무하던 중 9월에 탈영, 도피 중인 인물이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각, 한참 동안 관사 주위를 맴돌던 청년의 눈빛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더구나 그의 손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도끼가 들려있었다. 흉기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시 후 고 씨는 중대한 결심을 한 듯 관사 안으로 들어갔다. 관사 안은 어두컴컴했다. 고 씨는 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방에서 자고 있는 이 중령에게 다가간 고 씨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흉기로 그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으악!’
갑작스런 습격을 당한 이 중령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옆에서 자고 있던 이 중령의 부인은 비명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남편을 향해 흉기를 휘두르고 있는 낯선 청년의 모습을 발견하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청년은 공포에 질려 있는 이 중령의 부인한테도 가차없이 흉기를 휘둘렀다. 이 중령의 부인 역시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부인이 바로 영화 <전쟁과 여교사>의 실제 주인공 김재옥 씨였다.”
하지만 고 씨의 만행은 부부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고 씨는 옆방으로 가서 자고 있던 아이들을 향해서도 인정사정 없이 흉기를 휘둘렀다. 놀란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고 씨는 결국 이 중령의 세 자녀까지 무참히 살해하고 만다. 비명소리를 듣고 뒤늦게 달려온 가정부(15)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 씨가 일가족 5명과 가정부를 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10여 분에 불과했다. 천만다행으로 서울 친척집에서 살며 학교에 다니던 이 중령의 장남(14)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현장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이 중령의 운전병이었다. 발견 당시 이 중령과 그의 아내는 큰방에서 나란히 엎어진 채로, 세 아이들과 가정부는 옆방에서 이불을 덮어쓴 채로 죽어있었다. 현역 육군중령과 그 일가족을 상대로 한 난자극은 당시 군 수사기관을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수사팀은 처음에는 강도살인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으나 수법이 잔인하고 세간을 모두 부숴놓았다는 점 등에서 원한에 의한 살인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흉기는 안방 캐비닛에서 발견됐다. 군 수사기관은 용의자에 대해 2만 원의 현상금을 걸고 수배령을 내렸다.
며칠 후 수사기관의 레이더에 포착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탈영병 고봉수였다. 수사기관이 고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게 된 계기는 다이아몬드 반지 때문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현장을 수색하던 수사팀은 범인이 범행 후 집안을 뒤진 흔적을 발견했다. 없어진 물건은 다이아반지 등 값나가는 패물이었다. 수사팀은 조만간 범인이 패물을 처분할 거라고 확신하고 피해자의 다이아몬드 행방을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 ○○부대 A 중사가 홍천의 한 귀금속상에 2.4캐럿짜리 다이아반지를 1만 3000원에 처분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20대 중반의 군인이 값나가는 패물을 들고 온 것을 수상히 여긴 귀금속상 업주가 장물로 의심하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A 중사가 처분한 다이아몬드는 피해자 이 중령의 것으로 확인됐다.”
수사팀은 즉시 A 중사의 신병을 확보한 뒤 미행에 들어갔다. 그 결과 A 중사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탈영병 고봉수로부터 다이아몬드 반지를 팔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심부름을 해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수사팀은 서둘러 고 씨 검거에 나섰으나 고 씨는 이미 눈치를 채고 어디론가 잠적한 뒤였다.
하지만 고 씨의 도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십일 동안 꼭꼭 숨어있던 고 씨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예상 밖으로 서울이었다. 11월 12일 오후 6시경 서울 종로 5가에 있는 동흥백화점 근처 버스정류장 앞에서 행상을 하던 외사촌 동생을 만나러 온 고 씨를 노상에서 땅콩을 팔던 장사꾼이 발견, 신고했고 긴급출동한 수사기관에 검거됐다. 사건 발생 24일 만이었다.
도대체 고 씨가 이 중령과 그 일가족을 모두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 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충격적이게도 고봉수가 죽이려 한 대상은 이주석 중령과 그 가족이 아니었다. 원래 고봉수가 노린 사람은 전임 연대장이었던 박상근 중령(가명)과 그 가족이었다. 고봉수는 ‘박 중령과 그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나도 자살하려했다. 그래서 박 중령이 살던 집을 찾아가 자고 있던 박 중령과 그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전방부대에서 병기참모로 근무 중이던 박 중령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후였다. 박 중령이 살던 관사에는 얼마 전부터 이 중령 일가족이 이사 와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즉 고봉수는 엉뚱한 사람들을 6명이나 살해한 셈이었다.”
고 씨는 박 중령과 그 일가족을 왜 죽이려 했는지에 대해선 체포된 후에도 좀처럼 털어놓지 않았다. 수사팀을 한동안 애먹인 후에 털어논 고 씨의 얘기는 이랬다.
전남 ○○에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고 씨는 10세 때 어머니를, 15세 때 아버지를 연달아 잃고 사실상 고아로 자랐다. 고 씨는 15세가 되던 해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가난하고 고단한 삶이었지만 나름대로 건실한 청년이었던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된 것은 입대하면서부터였다. 징집을 피해다니다 자수한 고 씨는 1961년 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고봉수는 어느날 사역병으로 차출돼 대대장이던 박 중령의 집에서 잡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고봉수는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박 중령의 집에서 군화 한 켤레를 훔쳤다. 어찌보면 훈계 정도로 그칠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고봉수는 단단히 화가 난 박 중령에 의해 군 헌병대로 넘겨졌다. 그 이전에 집안에서 일어난 다른 도난사건까지 다 고봉수가 뒤집어썼다. 고봉수는 보통 분한 게 아니었다. 더구나 고봉수는 군 교도소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는 등 갖은 고생을 했다. 고봉수는 군 교도소에서 6개월을 복역하는 동안 박 중령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의 칼을 갈았던 것이다.”
고 씨는 6개월을 복역한 후 원대복귀했으나 그에게는 전과자란 딱지가 늘 따라다녔다. 군대 영창에 있는 동안 애인도 ‘전과자를 사랑할 수는 없다’며 냉정하게 떠나버렸다. 결국 고 씨는 출소 후 군대에 복귀한 후에도 박 중령에 대한 앙심을 거두지 못했다.
‘겨우 그만한 일로 나를 전과자로 만들어버리다니!’
결국 고 씨는 ‘다 죽여버리고 나도 죽어버려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고 씨는 박 중령 일가족 대신 엉뚱한 가족을 살해해버린 것이었다. 더구나 피해자 중에는 태극 무공훈장의 주인도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미운 사람이나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겐 ‘고봉수보다 나쁜 놈’ ‘제2의 고봉수’라고 욕하기도 했다. 심지어 우는 아이에게 ‘저기 고봉수 온다’라고 하면 대번 울음을 그쳤다는 얘기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살인귀’로 불리며 감방 동료들에게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고 씨는 수감생활 중 종교에 귀의,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고 한다. 특히 고 씨는 감방 동료들을 전도하기 위해 열의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고 씨는 또 수감 중 자신이 살해한 이 중령의 노모에게 참회의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고 씨는 1964년 봄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제가 2000명을 전도하고 가려고 했는데 다 못하고 갑니다. 나머지는 당신께 부탁드립니다.”
형장에 서던 날 고 씨가 자신을 전도시킨 종교인에게 남긴 말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