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살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 성매매 업소 여성들을 상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내용의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 ||
최근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 모습을 드러낸 전직 매춘여성 제이드 레이놀즈(24)는 첫 손님과의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연쇄 살인범 스티브 라이트 | ||
이들의 첫 만남 후 5년이 지난 2006년 말 조용하고 평화로운 입스위치에서 두 달 사이 매춘여성 다섯 명이 잇따라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해 영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피해자는 레이놀즈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네트 니콜스(당시 29세)를 포함해 모두 그녀가 아는 젊은 매춘여성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12월 말 경찰에 검거된 범인이 바로 레이놀즈의 첫 고객 라이트였다는 것이다. 운이 나빴다면 누구보다 먼저 그녀가 피해자가 되었을 터였다.
라이트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된 타니아 니콜이 사라진 것은 10월 말이었다. 당시 19세로 피해자 중 가장 어린 니콜은 그날도 일을 하러 입스위치로 가는 버스를 탄 후 실종됐다. 2주가 넘도록 그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니콜이 실종된 지 보름째 되던 날 또 다른 매춘여성 젬마 아담스(당시 25세)가 사라졌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스튜어트 굴 형사에 따르면 실종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그의 예감대로 12월 초 경찰은 입스위치 인근 벨스테드 강에서 발가벗겨진 아담스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리고 며칠 후 니콜의 시체 역시 같은 강에서 발견됐다. 이제 수사 대상은 실종이 아닌 살인사건으로 바뀌었고 300명의 정예요원들이 투입됐다. 하지만 두 피해자가 모두 물속에서 발견된 탓에 증거 확보가 어려웠고 수사진이 가진 유일한 실마리는 입스위치가 작은 동네였기에 아담스와 니콜이 비슷한 고객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는 점뿐이었다.
그런데 니콜의 시신이 발견된 이틀 후인 12월 10일 굴 형사는 한 운전자로부터 또 다른 여성의 시체를 봤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발견된 아넬리 알더톤(당시 24세)의 사체는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인 데다 심하게 훼손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시신이 젖지 않은 덕에 증거 확보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세 번째 희생자가 발견된 후 수사인력은 두 배로 늘어났다.
또 다시 이틀 후 이번에는 폴라 클레넬(당시 24세)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사건과 관련해 며칠 전 TV 인터뷰에도 출연한 적이 있던 매춘여성이었다. 그런데 클레넬의 시신을 찾기 위해 인근을 비행하던 군헬기가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한 구의 사체를 포착했다. 클레넬과 겨우 100m 떨어진 곳에 버려진 아네트 니콜스는 세 번째 피해자인 알더톤과 마찬가지로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으로 차갑게 언 땅에 버려져있었다.
이렇게 해서 작은 도시에서 단 열흘 새 다섯 명의 여성들이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 중 하나로 꼽혀왔던 입스위치 역사에 지워질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 살해당한 5명의 피해자. | ||
그러나 사건 후 2년이 지나고 라이트가 감옥에 갇혀있는 지금도 이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 영국의 범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커팅 에지>를 통해 재연되면서 다시 한번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라이트가 여전히 결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의 가족들은 결정적 단서가 된 DNA 증거에 오점이 있고 당시 두 명의 희생자가 발견된 장소 인근에 서있던 정체불명의 차량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수사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의 가족들은 범죄재심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진행형으로 남아있는 곳은 바로 희생자 가족과 친구들의 기억 속이다. 최근 언론에 입을 연 그들에게 희생자들은 ‘연쇄살해된 매춘여성’이 아닌 귀한 딸이며 친구였던 것이다.
첫 번째 희생자 니콜의 지인인 중년 남성 잭 라이트는 매주 금요일 아침이면 함께 차를 마시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가 아는 니콜은 마약중독 매춘여성이 아닌 자신에게 건강식을 권하던 따뜻한 소녀였다고 말했다. 니콜이 떠난 지금 그는 니콜의 어머니 케리와 친구가 되었다.
또 알더톤의 오빠 톰은 세상 사람들이 ‘(동생을) 매춘여성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아쉽다고 했다. 끔찍이 사랑하던 아버지를 잃은 충격으로 마약과 매춘에 빠지긴 했지만 그는 동생이 죽기 직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어린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며 몹시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살인마의 손에 친구들을 잃고 자신도 희생양이 될 뻔한 레이놀즈는 현재 임신 5개월로 새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사건 이후 그는 11세부터 손을 댄 마약도 끊고 매춘을 그만두었으며 평범한 직장여성으로 살며 자기 집도 마련했다고 한다. 어쩌면 끔찍하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었던 그는 이제 새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친구들이 자기 대신 죽었다”고 회상했다.
연쇄살인 등 참혹한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언론과 대중의 초점은 주로 살인범에 맞춰지고 그에 비해 정작 희생자와 고통 속에 남겨진 희생자 가족들의 존재는 쉽게 잊히곤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분노와 고통 속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을 기억하고 최대한의 위로와 보상 방법을 찾는 것도 우리 사회의 숙제가 아닐까.
이예준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