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죄 피하고 경범죄에 덜컥
닮은꼴인 친구 행세를 하며 도피 행각을 벌인 엽기적인 경우가 있었다. 2008년 3월 자신의 외모와 나이가 비슷한 지인 행세를 하며 3년 동안 도피행각을 벌여온 30대 여자 지명수배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청주상당경찰서에 따르면 7건의 사기죄로 2005년부터 지명수배 중이던 지 아무개 씨(여·36)는 2007년 6월 초 청주시 용암동 한 여관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이 아무개 씨(여·39)가 자신과 인상착의와 연령이 비슷하다는 점을 이용해 이 씨의 신분증을 훔쳐 8개월간 가짜 인생을 살아왔다. 지 씨는 도피생활 동안 이 씨 신분으로 위장해 평소 친분을 쌓아온 미용실 업주 임 아무개 씨(여·49)에게 접근해 반지와 시계 등 85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치다 발각되면서 경찰에 신분이 탄로났다.
사기 혐의로 수배된 범죄자가 해외로 도피했다가 국적과 이름을 바꾸고 귀국하려다 인천국제공항에서 검거되는 일도 있었다. 2008년 8월 20일 인천공항경찰대는 새벽 키르기스스탄인으로 국적과 이름을 바꾼 지명수배자 임 아무개 씨(38)를 붙잡았다. 임 씨는 지난 2000년 3월쯤 광주에서 피해자 조 아무개 씨 등 6명으로부터 2억여 원을 편취한 후 2001년 8월에 중국을 거쳐 키르기스스탄으로 도피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임 씨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이름을 ‘알렉산드르’로 바꾸고 미모의 현지인 백인 여성과 혼인해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학 과정까지 마친 뒤 경찰관시험에 합격하는 등 현지화에 성공했다. 특히 임 씨는 탤런트 뺨치는 얼굴과 모델 같은 늘씬한 신체조건, 능력 등을 인정받아 내무장관 비서 겸 경호원으로 발탁되는 등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임 씨의 화려한 변신은 내무장관의 한국 방문과 함께 ‘일장춘몽’으로 막을 내렸다. 임 씨는 키르기스스탄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내무장관의 안내 및 경호, 장관 부인의 신병 치료를 위한 병원 섭외 등을 수행하게 됐다. 임 씨는 자신의 귀국정보를 사전 입수한 인천공항 경찰대가 입국장에서 검문하자 키르기스스탄 여권과 경찰관 신분증 등을 제시하며 키르기스스탄인처럼 행세했으나 지문확인 과정에서 모든 게 들통났다.
당당하게 남의 이름을 빌려 쓰면서 도피 생활을 했지만 빌린 이름도 지명수배자라 덜미가 잡힌 황당한 경우도 있다. 30대 수배자가 자신의 성(姓)을 세 차례나 바꿔 진술하다 결국 붙잡힌 것. 전북 군산해양경찰서는 2007년 8월 23일 타인의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한 혐의(주민등록법 위반)로 황 아무개 씨를 붙잡았다. 경찰에 따르면 사기 및 벌금 미납 등으로 수배돼 1년 넘게 도피생활을 하던 황 씨는 이날 오전 충남 서천군 마량항에서 출항하려다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았다.
황 씨는 처음에는 당당하게 주민등록번호 13자리를 막힘없이 말하며 “난 울진에 사는 김 씨”라고 신분을 밝혔으나 조회 결과 김 씨 역시 지명수배자(배임 혐의)로 밝혀졌다. 수년 전에 같이 선원생활을 했던 김 씨의 주민번호를 외우고 다니다 경찰의 불심검문을 통과하려 했던 황 씨는 우연찮게 김 씨도 지명수배자인 바람에 거짓말이 들통난 셈이다.
의심을 품은 경찰은 일단 황 씨를 인근 파출소로 연행해 다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묻자 이번에도 남의 주민등록번호를 대며 “난 제주도에 사는 안 씨”라고 주장했다. 안 씨 역시 황 씨와 함께 선원생활을 했던 동료였다. 경찰이 지문인식과 화상 자료를 통해 신분을 확인하자 황 씨는 그때야 “난 황 씨”라고 털어놨다.
자신을 교도소에서 출소한 폭력배라고 하면서 무전취식을 하던 10대 지명수배자도 있었다. 대구보호관찰소는 지난 2월 17일 보호관찰을 받던 중 주거지를 무단이탈해 무전취식과 금품갈취를 일삼은 A 군(18)을 붙잡아 보호관찰 등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소년원에 구속수감했다.
보호관찰소에 따르면 A군은 2006년 5월 학교를 그만둔 뒤 몇 차례 비행을 저지른 끝에 지난해 2월 절도 혐의로 대구지법 가정지원에서 보호관찰 2년, 사회봉사명령 40시간을 결정받았다. 하지만 A 군은 보호관찰관의 지도감독에 순응하지 않고 같은 해 3월 잠적한 뒤 1년여 동안 도피생활을 해오다 지명수배자가 됐다. 조사 결과 A군은 도피기간 중 대구, 경산 지역 식당을 선후배들과 야간에 무리지어 다니면서 자신들이 교도소에서 출소한 폭력배라면서 협박하고 무전취식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길거리에 침 한번 잘못 뱉었다가 경찰에 덜미가 잡힌 경우도 있다. 2007년 9월 윤 아무개 씨(39)는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조사할 것이 있으니 검찰에 출석해달라는 것이었다. 윤 씨는 “지방에 현재 내려와 있으니 2∼3일 뒤에 조사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 뒤로 윤 씨는 검찰에 출석하지 않고 도피생활을 계속했다. 타인 명의의 휴대전화로만 연락을 취하고 일정한 주거도 없이 서울과 전남 광주, 해남 등지에서 윤 씨의 지인이 소유한 오피스텔을 전전했다.
그렇게 5개월 정도를 생활하던 윤 씨는 2008년 설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에 친구들과 함께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새벽 5시 45분쯤 서울 역삼동의 한 길거리에서 차에 올랐다. 윤 씨는 자신의 승용차에서 창문을 내리고는 아무 거리낌 없이 길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 순간 윤 씨의 운명은 달라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경찰관이 다가와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고 경찰관과 시비를 벌이던 윤 씨는 지명수배자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결국 붙잡히게 된 것이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