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권화폐 수십 다발 보여줘 깜박 속았다”
▲ 지난달 14일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전경환 씨. | ||
그런데 전 씨가 최근 사기혐의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취재 결과 전 씨는 2004년 11월경 사기사건으로 피소돼 도피했지만 지난해 2월 병원에 입원했다가 덜미를 잡힌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14일 비공개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전 씨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공범인 서 아무개 씨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전 씨는 건강 문제로 법정구속은 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환 씨가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사기혐의’로 고소를 당한 것은 2004년 11월경. 검찰에 따르면 전 씨는 그해 4월경 경기도 광주에서 택지개발사업을 벌이고 있던 모 건설사 대표 장 아무개 씨(51)에게 접근해 “아파트 건설 사업에 필요한 1억 달러(당시 환율로 1000억여 원) 유치를 도와주겠다”고 속여 업무추진비 명목으로 장 씨에게서 6억 원을 받았다.
전 씨는 이 과정에서 장 씨에게 1조 원대의 해외 차명계좌를 담보로 지급보증을 서주겠다고 제안하는가 하면 액면가 1억 달러짜리 채권을 보여주면서 막대한 비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장 씨는 검찰에서 “전 씨가 1만 원권 구권 수십 다발과 1억 달러짜리 미국 채권을 보여주며 ‘이 외에도 엄청난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고 속여 돈을 주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 씨는 그해 9월경 외자유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추석 이후 종적을 감췄다. 이에 사기를 당했다고 판단한 장 씨는 같은 해 11월 전 씨를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고소한 것이다. 하지만 전 씨는 검찰의 출석 요구에 불응하고 도피했다. 전 씨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검찰은 2006년 2월경 장 씨의 고발 사건을 기소중지시켰다.
그러나 전 씨의 이름은 이후에도 두 차례나 등장한다. 2006년 도피 중이던 전 씨가 구권화폐 사기 사건에 연루돼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샀던 것. 형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미끼로 한 거액의 사기사건 현장에 전 씨가 사기범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2007년 말에는 동거 중이던 한 여성의 딸과 관련된 사기사건에 연루돼 언론 지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전 씨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전 씨가 검찰에 검거된 것은 지난해 2월 초. 전 씨는 당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이 한 언론에 공개되면서 곧바로 검찰에 검거됐다.
당시 전 씨는 암 치료를 위해 입원했는데 하루 입원비가 100만 원 가까이 되는 특급병실에서 지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검찰은 전 씨가 암 수술을 받고 건강상태가 나쁜 상황임을 고려해 불구속 입건했다. 이후 전 씨는 항암치료를 받으며 9개월여 동안 장 씨 사기 사건으로 재판을 받아왔다.
그런데 취재결과 전 씨는 앞서의 장 씨 사건 외에도 3건의 사기사건이 더 추가돼 재판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이 전 씨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피해자 3명이 더 나왔던 것.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사업투자를 빌미로 돈을 가로챈 사실도 드러났다. 피해자인 C 씨(52)는 “전 씨가 미얀마에서 사업을 추진 중이니 투자를 하면 수익금을 배로 주겠다고 속여 3만 달러(3000여 만 원)를 받아 달아났다”고 주장하며 전 씨를 고소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특히 전 씨는 당시 수배 중인 상황이었지만 필리핀 등지를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 따르면 이렇게 총 4건의 고소사건으로 비공개 재판을 받아왔던 전 씨는 재판 과정에서 “나는 지명도 때문에 이용을 당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하며 “나 역시 피해자”라는 주장을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지난달 14일 1심 재판부는 전 씨를 이번 사기사건의 ‘주범’으로 판단,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주범’으로 몰렸던 서 아무개 씨(53)에 대해서는 단순 ‘공범’으로 인정,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전 씨는 건강 때문에 법정구속은 면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퇴원, 얼마 전까지 아들 집에서 거주하며 통원 치료를 받았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건강이 다시 악화돼 입원했다는 것. 법원에서는 “전 씨의 건강상태를 고려해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공범 서 씨 역시 전 씨와의 형평성이 고려돼 법정 구속을 면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재판 때 멀쩡한 사람이 휠체어 타고 들어가는 수법”이라며 “전 씨가 엄살을 부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전 씨의 건강 상태는 실제로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확인결과 전 씨가 지난해 3월 수술을 받을 당시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간암의 일종인 ‘하부 담도암’. 전 씨의 병세도 지금까지 초기 암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3기’ 진단을 받았었다고 한다.
전문의에 따르면 담도암 3기는 수술을 통해 암을 완전히 제거해도 5년 생존율이 30~40%밖에 안 되는 중병이다. 수술 후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보일 만큼 미세한 암세포만 남아있어도 생존율이 10~20%로 떨어진다고 한다.
한편 전 씨는 이번 판결에 대해 항소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 씨의 변호인 측에서는 “비록 전 씨가 법정 구속은 면했지만 오히려 자신도 피해자라고 항변하고 있다”며 “항소를 진행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전 씨의 건강이 많이 악화돼 과연 항소심을 끝까지 진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