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문도원 ‘에이스 킬러’로 떴다
초반에 선두를 달리던 서울부광탁스가 4위로 내려와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광탁스와 경쟁하던 ‘부안곰소소금’은 6위로 주저앉아 있다. 중위권을 지키고 있던 ‘인제하늘내린’과 ‘포항 포스코켐텍’은 명암이 양극으로 갈렸다. 하늘내린이 6라운드부터 힘을 내더니 현재 1위에 올라있는 것에 비해 포스코켐텍은 마지막인 7위로 떨어져 있다. 이에 반해 하위권을 맴돌던 ‘부산삼미건설’과 초장 3연패 늪에서 헤매던 ‘서귀포칠십리’가 각각 2, 3위로 비상했고, ‘경주이사금’은 계속 중하위권을 맴돌면서 리그 순위에 상대에 따라 승점을 주었다 빼앗았다 하는 것으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표>에서 보듯 선두와 꼴찌가 불과 2승 차이이고 중간 4팀은 승패 우열 없이 개인승수로 다투고 있는데, 1등과 7등 차이가 5승이다. 그러니 이제는 한 판 한 판이 승부다.
지금까지의 전황을 정리해 본다. 첫째, ‘외국 선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용병’이라는 말은 좀 그러니 쓰지 말자는 주장이 있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광탁스의 위즈잉은 처음엔 잘나갔으나 최근 2패로 주춤하고 있다. 독감으로 고생하고 있어 컨디션이 바닥이라는 것. 경주이사금의 루이나이웨이 9단도 활약이 없고, 하늘내린의 헤이자자 6단은 갤러리를 몰고 다니긴 하는데 아직 1승에 목말라 있다. 게다가 24일의 9라운드에서는 외국 선수들이 전패했다. 위즈잉은 경주이사금의 김윤영 4단에게 졌고, 헤이자자는 곰소소금의 김혜림 2단에게 완승 직전에 어이없이 시간패를 당했다. 한국어 초읽기에도 익숙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날은 귀에 잘 안 들어왔던 것.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삼미건설 박지연 3단 대 포스코켐텍이 최근 영입한 왕천싱 5단의 일전이었다. 왕천싱은 중국에서 위즈잉과 경쟁하는 강자여서 박지연이 좀 버거울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격돌했다. 전 날 한국에 건너온 왕천싱은 이 판이 데뷔전이었으니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박지연도 국내에서는 알아주는 터프걸. 상대가 ‘중국의 강자’라고 하니 더욱 투지를 불태웠을 것이다. 바둑은 타격전이었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백을 든 왕천싱이 두텁다는 소리가 나왔다. 왕천싱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선수 끝내기를 행사했다. 우상귀 흑말의 삶을 강요하는 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박지연의 흑돌이 그야말로 벼락처럼 좌하귀 백진으로 날아가 꽂혔다. 검토실이 깜짝 놀았다. 아니 어떻게 이런 빈틈을 찾아낸단 말인가. 이후 두 번의 엄청난 패싸움. 박지연은 왕천싱의 좌하변을 유린했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상변 흑 대마가 다시 패에 걸렸다. 백의 꽃놀이패. 그러나 왕천싱이 쓴 팻감이 작았다. 박지연은 패를 해소해 대마를 살렸다. 국면은 미세해졌다. 거기서 왕천싱이 끝내기로 버티자 이번에는 박지연이 좌상귀 백의 생사를 패로 추궁했다. 왕천싱은 당황했고, 박지연은 패의 대가를 취하는 것으로 깃발을 올렸다. 315수에 이르는 대접전이었고, 왕천싱은 벌게진 얼굴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여자리그 드라마의 주역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순위변동과 서귀포칠십리 약진의 주인공 문도원 3단이다. 서귀포는 1지명 오정아 2단이 처음부터 승승장구하며 주장 몫을 넘치도록 감당하고 있었는데도 꼴찌를 벗어나지 못했던 팀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문도원이 정관장배 7연승의 추억을 되살리며 힘을 내기 시작하자 단숨에 팀 색깔이 달라진 것. 문도원은 부광탁스의 최정 5단, 포스코켐텍의 조혜연 9단, 하늘내린의 오유진 초단 등 각 팀의 에이스만을 골라 발목을 잡았고, 26일에는 곰소소금의 이유진 초단까지 따돌려 ‘에이스 킬러’로 확실히 공인받았다. 각 팀에서 제일 성적이 좋은 선수에게 전부 이긴 것. 특히 오유진은 그때까지 6연승으로 질주하고 있던 스타였다.
이광구 객원기자
치열한 패싸움 공방 소개하는 기보는 박지연-왕천싱의 바둑. 박지연이 흑이다. 좌상귀 백1-3은 크고 맛도 좋은 자리. 박지연은 우하귀 흑4로 달려갔다. 백1-3도 흑4도 각자 노리는 게 있었다. 우상귀 백5의 젖힘, 선수다. 흑은 A에 두어 살아야 한다. 그러면 백B나 C가 또 선수. 이게 선수면 상변 흑진에 백D 같은 수단이 생긴다. 백1-3은 이런 걸 노리고 있는 것. 그러나 박지연은 흑A로 살지 않았다. 좌하귀로 손을 돌려 흑6으로 들어갔고 8로 치중한 후 10으로 들이대는 것이었다. 여기서 승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후는 숨이 멎을 듯 긴박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백의 응수는 <2도> 백1뿐이다. 흑은 2~6으로 헤집었고, 백11로 이을 때(흑10은 백1 자리 이음) 흑12로 이 돌도 살렸다. 백15를 보고 박지연은 우상귀로 돌아가 16으로 살았다. 좌하변에서 올린 전과가 다대했는데, 왕천싱이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듯 백17부터 노림을 발동했다. 백19-21로 끊고 돌려쳐 흑 대마의 생사를 묻는다. <3도> 흑1에는 백2-4에서(흑5는 백△ 자리 이음) 6으로 좁히고, 흑7-9 때 백10을 선수한다. 흑13에는 백14로 돌려쳐 패인 것. <4도> 흑1부터 패싸움. 좌하 백20의 팻감이 작았다. 흑은 상변 백△ 자리에 이어 대마를 살렸고, 백은 22로 흑 석 점을 잡았다. <5도> 흑1~5 다음 좌상귀 7로 젖히고 9로 호구이음한 것이 마지막 승부수. 백에게 가일수해 살라는 강요였다. 보다시피 흑17-19의 패가 있으니까. 백은 가일수하지 않고 좌하귀 백12로 버텼다. 선수 5집짜리의 큰 끝내기다. 박지연은 흑17-19의 패를 결행했고, 패의 대가로 좌변에서 흑A-B를 연타해 잡혔던 석 점을 살리고, 백 넉 점을 잡는 것으로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백12 다음 좌하귀에는 <6도> 백1로 잇는 수가 있다. 흑2로 이으면 백7까지 흑은 양자충. 24일은 박지연의 투혼이 빛난 하루였다. 이유진 오유진 송혜령, 새내기 초단들도 눈부시게 활약하며 여자리그 흥행을 이끌고 있다.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