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실컷 써보자’ 동창들의 잔혹한 수다
▲ 시골에서 상경한 20대 중학교 동창 세 명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일식집 사장님을 납치살해했다. 영화 <구타 유발자들>이미지 합성 | ||
“‘집에 곧 들어간다’던 남편이 귀가하지 않자 부인 이민정 씨(가명·31)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휴대폰으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봤지만 묵묵무답이었다. 뜬 눈으로 밤새며 초조하게 한 씨의 귀가를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오전 9시경 남편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뜬금없이 ‘수원의 골프장 내에 있는 매점을 계약하러 가는 길인데 돈이 필요하니 있는 대로 구해서 빨리 입금해달라’로 말했다.”
조금 서두르는 감이 있었지만 남편의 목소리는 여느때와 다름 없었다. 이 씨는 남편의 요구대로 일단 갖고 있던 현금 860만 원을 한 씨의 계좌로 입금했다. 그런데 얼마 후 한 씨는 친구에게도 전화를 걸어 마찬가지로 ‘매점 계약건’을 얘기하며 입금을 부탁했다. 한 씨의 친구는 3000만 원을 입금해줬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두 통의 전화를 끝으로 한 씨는 연락이 끊겼다.
부인 이 씨는 거액을 입금 받고도 아무 연락이 없는 남편이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잘 받았다’는 연락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남편은 태연한 척했지만 뭔가에 쫓기는 목소리였던 것 같기도 했다. 순간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설마…’하는 심정으로 17일 오전까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이 씨는 결국 경찰에 신고하기에 이른다.
실종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팀 내에서는 잠적과 실종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한 씨가 범죄에 연루됐음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부인 이 씨의 상황설명을 들은 수사팀은 안 좋은 예감에 휩싸였다. 수사팀은 다급히 한 씨의 예금 내역을 확인하는 동시에 은행계좌에 대해 지급정지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이미 전날 오전 11시 50분경부터 한 씨의 신용카드에서 거액이 인출된 것이 확인된 것이다. CCTV에는 20대 청년 2명이 한 씨의 신용카드를 이용, 매봉역에서 60만 원을 인출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이것을 시작으로 이날 오후 4시 40분까지 한 씨의 신용카드에서는 서울시내 지하철역 일곱 곳에서 무려 33차례에 걸쳐 총 990만 원이 인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지하철역을 돌아다니며 수십 차례에 걸쳐 돈을 인출하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확실한 것은 한 씨가 범죄에 연루됐다는 사실이었다. 한 씨가 부인과 통화할 때 언급했던 골프장 매점에선 그런 계약 자체가 없었다고 확인해줬다.
단서는 단 하나. 은행 폐쇄회로 TV에 찍힌 청년 2명이었다. 수사팀은 현금인출기 CCTV에 찍힌 청년 2명의 사진과 한 씨가 실종 당시 몰았던 흰색 벤츠 승용차를 전국에 수배했다.
용의자를 찾는데 중요한 일은 범행동기 파악이다. 수사팀은 한 씨가 2년 전 강남 중심가에 고급 일식주점을 오픈해 많은 돈을 벌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주변인들은 한 씨에 대해 “타고난 성실성과 추진력,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주변에서 상당히 평판이 좋았으며 젊은 나이임에도 탄탄한 입지를 다진 성공한 사업가였다”고 입을 모았다.
수사팀은 단기간에 목돈을 움켜쥔 한 씨의 소문을 듣고 돈을 노린 강남 일대 불량배들의 소행일 가능성에 주목했다. 아울러 한 씨와 채무관계에 있었던 이들에 대한 조사도 병행됐다. 수사결과 한 씨가 16일 오전 부인과 통화한 지역은 대전 일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돈이 인출된 곳은 모두 서울 시내 지하철역이었다. 이를 근거로 수사팀은 범인이 3~4명 이상일 것으로 추측했다. 수사팀은 범인 중 일부는 한 씨를 납치한 뒤 즉시 서울을 벗어났으며 일부만 서울 시내 지하철역을 돌아다니며 지속적으로 돈을 인출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상한 점은 범인들이 돈을 인출한 금액이었다. 한 씨의 통장에 4000만 원이 넘는 돈이 입금됐음을 모를 리 없는 범인들이 990만 원만 인출한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은 쉽게 풀렸다. 통장을 정리하지 않을 경우 인출 한도액은 1000만 원이었던 것이다. 조사결과 범인은 이후에도 일곱 차례에 걸쳐 인출을 시도했고, 19일에는 한 씨의 계좌개설지점에 전화를 걸어 지급정지사유를 묻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한 씨가 납치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범인의 윤곽은 드러나지 않았다. 수사팀 내부에서도 수사가 장기화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한 씨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용의자들의 윤곽이 수사팀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은 사건 발생 8일이 지난 6월 24일, 충남 천안시 안서동의 한 공터에서 한 씨의 벤츠 차량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차량은 앞뒤 번호판이 떼어져 있었고 차량 한쪽 면과 안개등이 파손돼 있었으며 유리틈에 소나무가지와 풀 등이 붙어 있는 등 엉망이었다. 특히 차량 뒷좌석에서 한 씨의 것으로 보이는 혈흔이 다수 발견돼 수사팀은 한 씨가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결정적인 것은 견인기사 A 씨의 진술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조사결과 한 씨의 차량은 18일 새벽 2시 30분경 충남 온양의 한 관광호텔에서 이곳으로 견인된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당시 견인차 운전사 A 씨로부터 ‘어떤 청년 2명이 견인차량업소를 찾아와 15만 원을 주고 견인을 부탁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고성찬(가명·22)과 이진석(가명·22). 수사팀의 레이더에 처음으로 포착된 인물이었다. 수사팀은 현금인출기 CCTV화면에 찍힌 사진을 토대로 탐문조사를 했고, 그 결과 이들의 동창생들로부터 ‘충남 홍성의 OO중학교를 졸업한 고성찬과 이진석이 확실하다’는 진술을 받기에 이른다.”
수사팀은 즉시 추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행방이 묘연했다. 이 씨의 여동생이 강남구 OO동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수사팀은 이 씨의 여동생 집 주변에서 잠복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튿날 이 씨에게 옷을 가져다주고 귀가하던 여동생을 추궁한 끝에 부산의 한 아파트에 은신해있는 이 씨를 검거했다. 그리고 서울로 압송된 이 씨로부터 동창인 고성찬과 최달호(가명·22)와 함께 한 씨를 납치, 살해한 후 충남 홍성의 야산에 암매장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수사팀은 이 씨의 진술대로 공범들의 연고지에 형사대를 급파, 검거에 들어갔다. 한편으론 이 씨의 고향인 충남 홍성의 한 야산에서 한 씨의 사체를 발굴하고 현장감식을 했다. 밤에 사체를 묻은 데다가 폭우에 매장 흔적이 씻겨나가는 바람에 이 씨는 30분 이상을 헤맨 뒤에야 간신히 매장장소를 찾아냈다. 이제 남은 건 공범들의 검거였다. 그런데 상황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그날 오후 공범인 고 씨와 최 씨가 관할인 충남 홍성경찰서에 자수를 해온 것이었다. 20일 이 씨와 헤어져 홍성의 친구집에서 은신했던 이들은 “진석이가 붙잡히면서 우리도 곧 잡힐 것 같아 자수했다”고 진술했다.
범행동기는 돈이었다. 범인들은 “돈이 없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우리 몇 달 치 월급을 하룻밤 술값으로 쓰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돈이면 못할 게 없는 세상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수사팀을 놀라게 한 것은 이들이 모두 ‘시골청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수사팀의 예상과 달리 이들은 악질적인 지역깡패도, 죄질이 나쁜 전과자도 아니었다. 중학교 동창인 이들은 모두 어려운 가정환경과 ‘돈없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기는 했으나 눈에 띄는 범죄전력이 없었다. 최달호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던 청년이었다. ‘돈 좀 벌어보겠다’며 상경했지만 지난달에는 일부러 고향집에 와서 모내기까지 거들어줬던 착한 아들이었다고 한다. 고성찬 역시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한 번 적발된 것을 빼면 전과가 없었다. 그는 술집과 공사장을 전전하며 어렵게 모은 돈을 다단계로 날리게 되자 4개월 전에 상경,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범격으로 알려진 이진석도 한때는 공사판에서 ‘장밋빛 인생’을 꿈꾸던 건실한 청년이었다. 그는 지하철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3개월 동안 무결근을 기록해 ‘노가다 신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욕망은 이들을 서울로 불러 모았다. 이들은 상경 후 공사판 등지를 전전하다가 최근 강남 일대의 유흥가에서 호객꾼과 종업원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계획없는 서울생활은 이들에게 허영심과 열등감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특히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일당 중 가장 먼저 상경한 이 씨는 한때 식당과 공사판을 전전하며 악착같이 살아봤지만 유흥업소 종업원을 하면서부터 점차 현실에 강한 불만을 갖게 됐다. 하룻밤에 유흥비로 수백만 원을 써대는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의 삶은 너무도 비참했던 것이다. 특히 두 달 전 동거녀를 폭행한 혐의로 입건돼 2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은 뒤 돈을 마련할 길이 없자 범행을 계획하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고향친구들을 끌어들였다.
16일 오전 4시 10분경 이들은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앞에서 벤츠 운전석에 앉아 전화통화 중이던 한 씨를 발견하게 된다. 한 씨를 범행 대상으로 찍은 이들은 무작정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가 한 씨의 허벅지를 흉기로 찔러 항거불능 상태로 만든 뒤 뒷좌석에 옮겨싣고 납치했다. 한 씨가 갖고 있던 현금 230만 원과 신용카드를 빼앗은 이들은 한 씨의 차량을 이용해 고향인 홍성에 도착한 뒤 한 씨의 부인과 친구에게 돈을 입금하라는 전화를 걸게 했다.
그런데 17일 오전 2시경 홍성의 한 야산에서 한 씨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차를 몰고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한 씨의 차량은 3m 아래 잡목 숲으로 떨어졌고 차를 버리고 달아나던 한 씨는 다리의 자상 때문에 과다출혈로 실신, 결국 일당에게 다시 붙잡히게 된다. 자신들의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이들은 결국 한 씨를 목 졸라 살해, 야산에 암매장하고 만다.
조사결과 이들은 한 씨를 살해한 17일 밤 서울 동대문의 한 술집에서 거나하게 술파티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한 씨로부터 빼앗은 1000만여 원 중 400만 원 이상을 하룻밤 술값과 팁으로 탕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평소 그토록 꿈꾸던 생활은 말 그대로 하룻밤의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특히 금의환향을 꿈꾸며 상경했던 ‘시골청년’들의 섬뜩한 변신에 가족들과 이웃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고 한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