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행 계약금 한방에 날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천수가 또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했다. 감기몸살을 앓고 있다는 핑계로 구단으로부터 2주간의 휴가를 받고 일시 귀국했던 것. 이를 두고 국내 언론들은 ‘향수병 때문’이라고 보도했고 이를 접한 국내 팬들은 다시 한 번 이천수에게 돌을 던졌다. 이때부터 이천수의 축구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폭행, 사기 등으로 피소당하며 사생활에서도 물의를 일으켜 팬들의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일요신문>의 취재 결과 이천수가 페예노르트로부터 2주간의 휴가를 받아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한창 물이 오르려 하던 2007년 12월 그가 갑자기 귀국해야만 했던 속사정은 무엇이었을까.
최근 부산지역 중견기업인의 장남인 문 아무개 씨가 총 여덟 명에게 돈을 빌렸다가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산지검 동부지청, 창원지검, 창원경찰서 등 몇몇 수사기관에 고소를 당했다. 현재 이 사건은 부산지검 형사부에서 통합해 수사하고 있다.
고소를 당한 문 씨는 부산에선 제법 알려진 기업의 자제다. 어머니가 부산지역에서 토목 관련 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고 현재 6~7개 사업체를 가진 그룹 회장이자 부산 지역 경제단체 회장을 맡고 있는 중견기업 오너다. 장남인 문 씨도 부모가 운영하는 몇 개 회사의 지분을 상당 부분 가지고 있다.
이천수가 네덜란드 생활 중 국내에 급히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문 아무개 씨와 관련이 있다.
이천수와 문 씨가 처음 만났던 것은 지난 2007년 8월이다. 당시 이천수는 부산지역 무속인인 진 아무개 씨를 통해 문 씨를 소개받았다. 문 씨는 이천수에게 ‘자신은 부산지역 모 기업체를 이어받을 사람이며 현재 서울에서 연예기획사도 운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몇 차례 술자리를 통해서 이천수와 얼굴을 익힌 문 씨는 이천수가 네덜란드 구단과 계약을 한 사실을 알고 이천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경남 창원에 있는 오피스텔 지하에 상가분양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따른 공사비 등 긴급 자금이 필요하다”며 이천수에게 총 5억 5000만 원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그는 돈을 빌려주면 상환할 때까지 매월 이자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천수는 그동안 스페인과 국내 리그 등에서 뛰며 계약금과 연봉 등을 받아왔지만 부모님에게 인천 모처에 집을 사드린 이후라 수중에는 페예노르트로부터 받은 계약금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천수는 문 씨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선뜻 돈을 빌려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씨의 약속은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는 게 이천수 측의 주장이다. 문 씨는 몇 개월 째 원금은커녕 이자도 내지 않았다.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해도 이런 저런 변명을 둘러댈 뿐이었다. 그렇다고 문 씨에게 갚을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천수 측의 주장에 따르면 문 씨는 ‘조금만 있으면 돈을 갚겠다’고 말한 시기에도 고급 외제차를 여러 대 굴리고 다녔고 밤에는 고급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는 것.
네덜란드에 있던 이천수는 배신감에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시즌 중임에도 구단의 양해를 구하고 2주간의 휴가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감기나 향수병 때문이 아니라 문 씨에게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급거 귀국한 것이었다. 문 씨에게 빌려준 돈은 사실상 이천수의 전 재산이었다. 그만큼 그 돈은 이천수에게 중요했다.
이천수가 한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안 문 씨는 이런 저런 사정을 들먹이며 이천수와의 만남을 피했고 결국 이천수는 문 씨를 만나 보지도 못하고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네덜란드로 돌아간 이천수는 분을 삭이고 운동에 집중하려 했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만 쌓여 갔다. 결국 그는 2008년 1월 경기 도중 발목에 심한 부상을 당하고 그 해 5월 한국에서 발목 수술을 받았다.
이천수의 지인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결국 운동에 심각한 영향을 준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천수는 부상으로 인해 네덜란드에서 K리그의 수원 삼성으로 임대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페예노르트 구단의 전력 외 선수로 분류됐다. 부상도 한 원인이었지만 사적인 문제로 시즌 중 팀을 이탈해 구단에 신뢰감을 주지 못했던 것도 무시 못 할 원인이 된 것 같다고 주변에선 지적했다.
1년이 지났지만 이천수는 끝내 돈을 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결국 다른 사람에게 1억 원가량의 돈을 빌려야 했다. 채무관계가 얽히고설키면서 이천수 역시 빌린 돈을 갚지 못했고 결국 사기혐의로 피소됐다. 지난해 말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바로 그 사건이다. 이 보도로 이천수에 대한 구단(수원 삼성)과 팬들의 신뢰도는 더욱 떨어졌다. 이천수는 결국 지난해 9월 문 씨를 사기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인과관계만 놓고 본다면 이 사건은 이천수와 문 씨 사이의 채무관계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고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천수가 어리석었다’고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 씨의 지난 행적을 살펴보면 이천수의 불행이 반드시 그의 순진함(?)에서만 비롯됐다고만 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문 씨는 이천수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린 후 이를 갚지 않은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 씨는 돈이 좀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접근해 자신이 부산 지역 유지의 아들이고 일단 급한 돈만 빌려주면 나중에 이를 갚겠다는 식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피해자들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실제 문 씨가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적으로 호감이 갈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슷한 사례로 피해를 본 사람이 자신 이외에도 여럿 있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문 씨로 인해 물질적 피해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해까지 입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 지역의 사업가인 김 아무개 씨의 경우다.
건축자재 및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 씨는 지난 2000년 초 문 씨의 집을 리모델링해주면서 문 씨를 처음 알게 됐다.
사업체들을 눈으로 확인한 김 씨도 사업상 문 씨와 알고 지내는 것이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하고 이후 몇 차례 술을 마시며 친분을 쌓아갔다. 어느 정도 안면이 익게 되자 문 씨는 김 씨에게서 2000만~4000만 원씩 몇 차례에 걸쳐서 빌렸다. 이때만 해도 문 씨는 빌린 돈을 잘 갚았다.
문제는 김 씨가 김해 모처에 공동명의로 상가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문 씨가 알면서 발생했다. 자기 몫(지하 및 2층) 상가를 다른 사람에게 14억 원에 매각하려던 김 씨는 문 씨가 돌연 이 상가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끈질기게 매달렸다고 한다. 특히 김 씨는 “(문 씨가) 건물을 나에게 넘기면 매각대금은 별도로 하고 김 씨에게 (부친 소유의) 골프장 및 아파트 개발권 등의 특혜를 주겠다는 미끼를 던졌다”고 말했다. 결국 김 씨는 문 씨에게 계약금만 받고 상가 명의를 넘겼다.
그러나 이후 문 씨는 내야 할 중도금과 잔금을 단 한 차례도 이행하지 않았고 이에 피해자들은 김 씨로 하여금 잔금 이행을 할 것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김 씨는 문 씨가 발행하는 약속어음을 여러 차례 가져다 이를 본인이 할인해 썼다고 주장했다. 문 씨가 내거나 막아야 할 건물 대금이나 어음 등에 대해 그가 책임지지 않자 결국 자신의 신용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김 씨는 자신 소유의 부동산을 담보로 20억 원을 대출받아 일단 건물대금과 어음을 막아 급한 불을 껐다.
그러나 이후에도 문 씨는 김 씨에게 받아간 어음을 계속 할인해서 사용했고 만기가 된 어음을 막지 못하면 김 씨의 회사가 부도난다는 사실을 악용해 김 씨에게 채무를 계속해서 떠넘겼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김 씨의 회사는 어음을 막지 못해 1차 부도가 났다. 김 씨는 문 씨를 경찰에 고소했고 구속 위기에 몰린 문 씨가 김 씨에게 선처를 부탁해 결국 다시 합의를 봤다. 그러나 문 씨는 합의대로 채무를 변제하지 않았다.
김 씨는 문 씨에 대해 “어떤 목적이 있어서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 상습적이고 장난처럼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 갚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 씨는 이천수와 김 씨를 포함해 대구에 사는 가정주부 박 아무개 씨, 부산지역 사업가 이 아무개 씨 등 총 8명에게 40억 원가량을 빌린 후 갚지 않아 검찰, 경찰 등에 고소를 당한 상태다. 사업가 이 씨의 경우 5억 원을 빌려준 후 돌려받지 못해 사업체가 모두 파산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 씨는 이들에게 하나같이 “조만간 돈을 갚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돈을 갚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문 씨는 왜 돈을 갚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상환능력이 없는 것일까. 취재 결과 문 씨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회사에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2008년 말 현재 A 산업 지분 46.5%, B 레미콘 지분 20%, A 개발 지분 2.5% 등을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들이 비상장이기 때문에 지분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회사들의 지난해 외형을 더해보면 총 361억 원 정도에 이르는 탄탄한 기업들이다. 문 씨가 마음만 먹으면 상환할 수 있었던 금액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문 씨가 피해자들에게 돈을 빌려 갚지 않은 것이 의도적이고 상습적이었는지는 수사 기관에서 판단할 문제지만 이천수의 경우 결국 문 씨의 채무 불이행이 발단이 되어 네덜란드 진출 이후 재도약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부산지검에서는 피해자들과 문 씨에 대한 조사를 모두 마친 상태며 구속 여부를 놓고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서는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기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에 대해 전해들은 서울 중앙지검 한 관계자는 “피고소인인 문 씨의 얘기를 들어봐야겠지만 외형적으로는 피해자가 여러 명이고 수법이 비슷하고 금액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구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기자는 문 씨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문 씨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음성메모 등을 남겼으나 답이 오지 않았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