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헌재 경제부총리(왼쪽), 강동석 건교부 장관 | ||
“공무원 사회가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취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거듭된 주문에도 불구하고 성과는커녕 ‘부처 이기주의’ 등 고질적인 병폐로 인해 여권 전체가 부담을 안게 되는 케이스가 빈발하면서다. 발탁형 인사와 1~3급 고위 공무원을 해당 부처가 아닌 중앙인사위원회 소속으로 두는 ‘고위 공무원단’ 제도 도입 등 다방면의 대책이 시도되고 있지만 별반 효과가 없다는 것이 여권 핵심부의 평가다.
관료사회에 대한 여권 핵심부의 ‘싸늘한’ 시각이 표출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노 대통령부터가 고위 관료들 앞에서 “지금 우리가 일등 국가인지, 공무원인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8월18일, 중앙부처 기획관리실장 혁신토론회)”→“한 1년 반 하면서 느낀 것은 (공무원들의) 문제의식이 좀 부족하며 하던 대로 하는 경향이 좀 있다”(8월21일, 장차관급 정책사례분석 토론회)→“정부혁신이 더디게 진행된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9월4일, 차관급 공무원 혁신사례 학습토론회)며 불만을 가감없이 토로한 바 있다.
열린우리당내에서도 최근 들어 관료들에 대한 불신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단단히 손을 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해찬 총리와 정동영 통일, 김근태 보건복지,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 등 당 중진들이 대거 내각에 진입한 것을 계기로 ‘당정 일체’ 기운이 고양될 것이라 기대를 가졌지만 관료주의의 ‘벽’을 허물기엔 아직 역부족이란 토로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여권내에선 최근 ‘관료 탓’에 문제가 발생된 현안으로 ▲통합거래소 이사장 선정 잡음 ▲신행정수도 이전 무산 대안 번복 해프닝 ▲국민연금 기금 활용 논란 등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당정청(黨政靑)간에 아직도 ‘잠재적 뇌관’으로 남아 있는 공직부패수사처 신설을 둘러싼 이견도 같은 맥락이란 평가다.
이 중 추천 후보 3인이 모두 사퇴하면서 ‘청와대 외압’ 의혹으로 비화된 통합거래소 이사장 선정 논란은 여권 핵심부의 의중을 관료들이 ‘무시’하면서 평지풍파를 일으킨 사건이란 게 정설이다. “‘정치적 고려’를 앞세운 여권과 ‘제 밥그릇 찾기’에 혈안이 된 관료들의 볼썽사나운 다툼”이라는 혹평도 나온다.
여권 핵심부는 내년 1월 설립되는 통합거래소의 이사장에 일찍부터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염두에 두고 주무 부처인 재경부측에 직·간접적으로 협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전 수석은 행시 7회에 합격한 후 김영삼(YS) 정부 시절 경제기획원 차관-공정거래위원장-청와대 경제수석-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통 경제관료 출신.
‘YS 사람’이란 인식이 강한 한 전 수석은 노 대통령과 여러 면에서 인연이 깊다. 우선 고향이 경남 김해로 같고, 노 대통령이 16대 총선에서 출마한 부산 북·강서 을은 15대 때 한 전 수석의 지역구였다. 게다가 둘은 한 전 수석이 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02년 6·3 지방선거 당시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하면서 남다른 관계가 됐다.
그러나 한 전 수석은 지방선거 패배 이후 노무현 캠프와 한동안 거리를 둔 탓인지 정권 출범 후 요직 하마평에 올랐다 번번이 미끄러졌다. 경제부총리 물망에 올랐던 적도 있었고, 대한주택공사 사장-한국전력 사장 임명과정에서도 유력후보로 거론되다 고배를 마셨다.
여권 핵심부가 통합거래소 이사장으로 한 전 수석을 밀기로 한 것은 이 같은 전력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는 해석이다. 때마침 부산 출신 여권 인사들도 통합거래소가 부산에 위치한다는 점과 한 전 수석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지원을 촉구했고, 이에 ‘한이헌 카드’가 정식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작 ‘칼자루’를 쥔 재경부쪽에선 후보 추천 초기부터 여권 핵심부의 의중을 철저히 무시했다는 후문이다. 여권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재경부 관료들을 성토하고 나선 것은 추천과정에서 이들이 ‘눈가리고 아웅’식의 대응을 보여왔다는 점이다. 재경부측이 “추천은 전적으로 민간위원들로 구성된 추천위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 해명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내막은 이렇다. 이사장 후보 추천은 재경부 주장대로 외형상 민간위원 7인으로 구성되는 추천위원회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위원회 구성 권한은 통합거래소 설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광림 차관)가 갖고 있고, 추진위 멤버 9인 중엔 위원장을 비롯, 증권거래소-선물거래소 이사장, 코스닥시장 사장 및 코스닥위원회 위원장,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등 전직 재무부 관료 출신의 ‘준(準) 정부 인사’들이 3분의 2에 달해 사실상 재경부의 의사가 관철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것.
▲ 여권에선 김근태 복지부 장관의 국민연금 발언 역시 관료들에게 휘둘렸다는 시각이다. | ||
여권 한 인사는 “이번 사건은 청와대에서 외압을 가했는가가 본질이 아니라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여권 핵심부의 의중도 아랑곳하지 않는 재경부 관료들의 구태로, 보기에 따라선 일종의 ‘권력누수’로도 읽힐 수 있다”며 “외압 의혹에도 불구하고 여권 핵심부가 이사장 선정 과정에 제동을 건 것은 이 같은 불쾌감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또 “이헌재 경제부총리도 이번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재무부 출신이라는 한계를 드러낸 것 아니냐는 시각이 여권내에 많다”며 “특히 추천위가 1순위로 올린 것으로 알려진 정 산은 총재가 이 부총리의 경기고-서울대 후배로 대표적인 ‘이헌재 사단’ 멤버라는 점은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덧붙였다.
“신행정수도 이전 무산 대안을 제로 베이스에서 검토하겠다”고 해 충청권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의 발언(25일)도 관료들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킨 경우다. 가뜩이나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 ‘위헌 결정’(10월21일) 이후 ‘충청권 달래기’에 전력을 투구하고 있던 여권으로선 강 장관의 ‘폭탄 발언’에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란 반응을 보였다.
당장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강 장관의 발언으로) 충청권 주민들의 반향이 대단히 걱정스럽다. 이런 문제를 처리할 때 행정부처는 대단히 신중해야 한다 생각한다”며 공개적으로 질타했고, 김한길 당 행정수도대책특별위원장은 강 장관에게 항의전화를 걸어 해명을 요구했다. 충청권 의원들 사이에선 강 장관이 언론사 부장단들과의 오찬에서 문제의 발언을 한 점을 들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술 먹고 말실수한 것 아니냐”는 등의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터져 나왔다.
결국 강 장관은 다음날인 26일 “제로 베이스의 뜻은 정부에서는 어떤 대안도 미리 정해둔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충청도와 일부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공개사과해야 했다.
주목되는 것은 여권내에선 강 장관 발언 파문과 관련, 관료사회에서 ‘성공신화’로 꼽히는 강 장관의 ‘코드’와 정치적 무감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열린우리당 한 386 의원은 “이번 일 때문에 강 장관의 이력을 살펴봤더니 65년 행시 3회에 합격한 이래 현재까지 40여 년간 한때도 쉼없이 정부 부처와 정부 산하단체장을 오가며 ‘롱런’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어 놀랐다. 그런 커리어를 가진 강 장관에게서 ‘이 정권에서 하다가 말면 그만두고 다음 정권에서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순리’라는 관료들의 논리가 먹혀드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김근태 쇼크’로 지칭됐던 국민연금 기금 활용 논란도 기금 운영을 계속 주도하려는 보건복지부 관료들의 의도에 김 장관이 ‘휘둘린’ 측면이 상당하다는 게 여권의 시각이다. 김 장관이 복지부 홈페이지에 올린 자신의 글이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자 노 대통령에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재경부 등 경제부처가 (연금의 운용·관리 감독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끝까지 고집한 배경을 복지부 관료들의 이해관계와 떼놓고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
관료들의 이 같은 행태에 대한 비판론이 고조되면서 대응책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우선 연말-연초 공직사회의 대대적인 인사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재임 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청와대와 정부 고위 인사들이 인사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 김우식 비서실장과 김병준 정책실장의 내각 진출 가능성과 수능 부정 문제로 홍역을 겪고 있는 안병영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과 재경부-외교통상부-건교부-기획예산처-해양수산부 등 관료 출신 장관들의 경질설이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열린우리당 내에선 내친 김에 관료들을 확고히 장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정무차관제’ 도입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다시 힘을 얻고 있다. 한때 여권 일각에서 추진됐던 정무차관제는 이해찬 국무총리가 얼마 전 재경부-외교부 등에 한정적으로 도입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최근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제도 신설 여부와 관계없이 다가올 당정 개편에서 상당수 부처에 여당의 초선의원들과 원외인사들을 진출시키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