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 중에 얌체짓 배신자를 처단하라
▲ 영화 <작전> | ||
“어, 이 차 아직도 여기 있네.”
이상하게 여긴 A 씨는 승용차로 다가갔고 차량 내부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A 씨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운전석에는 피투성이 상태의 젊은 남자가 비스듬히 누운 상태로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1995년 증권가를 발칵 뒤집어놨던 일명 ‘증권사 대리 살인사건’이다.
명백한 살인사건이었다. 피살된 사람은 D 증권사 대리였던 이현준 씨(가명·32)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씨의 가족들은 이날 오전 이 씨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회사 측의 연락을 받고 이 씨의 친구를 통해 행방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그가 서울 외곽의 식당 주차장에 세워진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사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승용차 안은 엉망이었다. 곳곳에 피가 튀어 있는 등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이 씨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이 씨의 온몸에서는 예리한 흉기로 찔린 상처가 무려 17곳이나 발견됐다. 현장 상황으로 보아 살인은 차량 안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사체 상태나 혈액응고 등으로 볼 때 이 씨가 피살된 것은 이날 새벽 무렵, 즉 사망한지 불과 7~8시간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됐다. 조사 결과 이 씨는 전날 오후 7시께 다른 증권사에서 근무하는 동료 4명과 함께 이 식당에 도착해 술을 마셨으며 이날 새벽 3시까지 포커게임을 하다가 헤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지인들에 따르면 이 씨는 이 멤버들과 함께 한 달에 한두 번꼴로 이 식당에 들러 증권 관련 정보를 교환해왔다.”
현장 감식을 마친 수사팀은 처음부터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이라고 판단했다. 목을 비롯해 온몸을 난자한 살해수법이 몹시 잔인했을 뿐 아니라 없어진 금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범인이 차량을 뒤진 흔적도 없었으며 이 씨의 주머니에는 현금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수사팀은 우선 이 씨의 가족과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조사를 벌였다. 이 씨의 가족들은 “이 씨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고 형제간 우애도 두터웠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누구에게도 원한을 살 만한 일은 절대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원한으로 살해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씨의 피살소식에 충격을 받은 것은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사결과 서울의 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Y 증권에 입사한 이 씨는 실적이나 업무에서 줄곧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90년 초 D 증권으로 스카우트된 것으로 드러났다.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이 씨는 사측으로부터 성실하고 능력 있는 직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주로 Y 증권 입사동기 4~5명과 자주 어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의 피살소식이 알려지자 증권가는 일대 충격에 휩싸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증권가에서는 이 사건을 애초부터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이미 이 씨의 죽음이 단순 살인이 아닌 주식시장 시세조정인 ‘작전(집단이나 개인이 특정 주식을 대량매입한 후 호재성 소문을 퍼뜨려 가격을 순간적으로 올려 큰 차익을 노리는 불법시세조종행위)’과 관련된 보복살해라는 루머가 나돌고 있었다. 이 루머가 사실이라면 주가조작을 둘러싼 일명 ‘세력’들 간에 벌어진 초유의 살인사건임이 자명했다. 유능한 증권사 대리의 피살과 관계된 흉흉한 루머가 난무하는 탓에 당연히 증권가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수사팀은 피살된 이 씨의 주변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수사팀은 중요한 첩보들을 듣게 된다. 바로 이 씨가 ‘작전’에 개입해 단기간에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증권가에서는 대리급에 불과한 이 씨가 그해 초 그랜저승용차를 일시불로 구입해 몰고 다니는 등 부유한 생활을 해온 것과 관련, 미확인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또 그 당시 이 씨가 동료에게 7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빌려줬다는 사실도 파악됐다. 상식적으로 볼 때 증권사 대리가 월급이나 정상적인 주식투자로 그 정도의 목돈을 벌었을 리는 없었다. 수사팀이 주목한 것은 당시 작전주로 지목된 A 통신의 주식을 거래함에 있어 이 씨가 큰 이익을 챙겼다는 사실이었다. 이 씨가 4월부터 이 주식에 대한 작전을 벌이다 혼자 먼저 주식을 팔아 수억 원의 단기차익을 챙겼고 작전에 참여했던 다른 직원들이 적잖은 손해를 본 정황이 드러난 것이었다. 또 ‘이 씨는 과거에도 작전주에 개입해 요령껏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고 혼자 발을 뺀 이 씨로 인해 손해를 본 사람이 여럿 있다’ ‘배신자 이 씨가 한 번은 크게 다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는 말도 그냥 흘러 들을 것만은 아니었다.
과연 이 씨를 둘러싼 루머들은 사실일까. 수사팀은 이 씨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다각도로 탐문조사를 하면서 사건 전날 식당에서 이 씨와 함께 술을 마셨던 사람들에 대해 특히 강도높은 조사를 진행했다. 사건 당일 새벽까지 이 씨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Y 증권 입사동기이자 당시 타 증권사 대리로 근무하고 있던 최동민 씨(가명·30) 등 4명이었다. 수사팀은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최 씨 등이 관리하고 있는 주식계좌에 대한 추적 작업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중요한 단서가 포착됐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최동민의 승용차 조수석 바닥에서 혈흔양성반응이 나타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차 트렁크에 있던 반바지와 장갑, 슬리퍼에서도 혈흔이 발견됐다. 최 씨는 지난해 7~9월 사이 주가조작으로 2억~3억여 원의 매매차익을 남긴 혐의로 회사로부터 정직 3개월의 처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증권감독원로부터도 고발당해 검찰 조사도 받은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최 씨는 수차례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특히 차명계좌에 대한 추적이 어려워 수사는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범죄는 없는 법이었다. 수사팀은 최 씨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인물들을 조사하던 중 그의 회사 후배 유병기 씨(가명·29)의 손에 난 상처에 주목했다. 유 씨는 피살된 이 씨와도 친한 인물이었다. 유병기의 손에 난 상처가 칼에 의한 것임을 확인한 수사팀은 유 씨가 범행을 저지르다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결정적인 것은 국과수의 감정결과였다. 피살된 이 씨의 승용차에서 나온 혈흔이 유 씨의 혈액과 일치했으며, 최동민의 승용차와 반바지 등에서도 이 씨와 유 씨의 혈액이 검출됐던 것이다. 이는 이 사건에 이들이 개입돼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빼도 박도 못 할 증거였다.
결국 수사팀은 19일 새벽 추궁 끝에 유 씨와 최 씨로부터 모든 범행사실을 자백받기에 이른다. 요약하면 이 사건은 직장 선배인 최 씨로부터 살인을 청부받은 유 씨가 저지른 범행이었다.
피살된 이 씨와 살인을 청부한 최 씨는 Y 증권 입사동기로 수년동안 절친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이들은 다른 회사로 옮긴 뒤에도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증권정보를 교환해왔으며 작전에도 수차례 같이 참여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살인청부를 받고 이 씨를 직접 살해한 유 씨는 이 씨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학교와 직장 선·후배, 직장 동기 등의 관계로 얽힌 세 사람은 평소에도 중요한 정보 등을 공유하며 스스럼없이 친하게 어울려 왔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 씨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사결과 범행동기는 일종의 ‘괘씸죄’였다. 이들은 ‘작전’ 과정에서 이 씨가 작전에 동참한 동료들을 따돌리고 혼자 거액을 챙긴 것 등에 대해 앙심을 품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자백했다. “이 씨가 작전에서 혼자 이익을 챙기고 빠지는 식으로 동료들에게 피해를 줬다. 손만 봐주려한 것이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됐다” “‘실적을 올릴 수 있는 투자정보 좀 달라’ ‘계좌를 터 달라’고 요구했으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 씨를 살해한 후 그가 관리해온 고객들의 차명계좌를 몰래 빼돌려서 나눠가지려 했다고 추가로 실토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들이 차명계좌에 들어있는 수십억 원대의 돈을 가로채려했다는 추가 자백은 현실성이 없다는 시각이 많았다. 수십 개의 차명계좌의 돈을 가로채려면 계좌별로 고객카드와 도장을 확보하고 비밀번호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 씨 외에는 자금인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권전문가인 최 씨 등이 몰랐을 리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조사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 씨는 이 씨가 주가조작으로 거금을 챙기면서도 정작 자신은 따돌리려 하자 앙심을 품고 범행을 결심했다. 하지만 자신은 쉽게 용의선상에 오를 것이 뻔해 직장후배인 유 씨를 끌어들였다.
최 씨는 범행 일주일 전인 4일경 회사 사무실에서 유 씨에게 ‘현준이를 없애주면 1억 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고교 선배를 살해할 것을 결정하는 일은 유 씨에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망설이던 유 씨는 이내 결심을 굳히기에 이른다. 안 그래도 작전에 참여하려 했다가 거절당해 이 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당시 전세살이를 하는 등 형편까지 넉넉하지 못했던 유 씨가 결국 최 씨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범행계획인 식당을 미리 답사까지 하는 등 치밀한 범행현장을 세운 최 씨는 11일 오후 2시께 ‘OO식당에서 현준이가 낀 포커모임이 열린다’는 사실을 유 씨에게 알려줬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최 씨로부터 이 씨의 동선을 알아낸 유 씨는 갈아입을 옷과 길이 25cm짜리 등산용 칼을 준비, 사건 당일 밤 11시경 이 씨 일행이 있는 식당 근처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이날 새벽 3시 10분경 자신의 그랜저 차량에 타는 이 씨를 따라 재빨리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유 씨는 이 씨에게 ‘작전종목 들어갈 때 정보 좀 줘요’ ‘계속 선배 혼자만 얍삽하게 욕심 차릴겁니까’ ‘앞으론 작전하다 중간에 혼자 빠지지 마요’라는 말로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이에 기분이 나빠진 이 씨는 유 씨의 뺨을 때렸고 유 씨는 미리 준비한 흉기로 이 씨의 목과 가슴 등을 마구 찔러 살해한 것이었다.”
미리 준비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유 씨는 때마침 현장에 나타난 최 씨에게 혈흔이 묻은 바지와 칼을 처리해줄 것을 부탁한 뒤 귀가했고 최 씨는 비닐봉지에 범행 증거물을 넣어 한남대교 부근 한강에 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유 씨는 범행 당시 손에 상처를 입었고 추후 상처 때문에 의심받을지도 모른다고 판단, 일부러 집 유리창을 깨뜨리고 병원에서 치료까지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주식거래를 둘러싼 젊고 유능한 증권사 직원들 간의 ‘암투’는 결국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한편 남은 이들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김원배 연구관의 사건 회고
금융실명제 허점 살인 불러
▲ 김원배 연구관 | ||
김원배 연구관은 이 사건을 황금만능주의와 모럴해저드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자본시장 질서를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할 증권사 직원들이 불법적인 수법으로 차익을 챙기고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에 국민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증권사 직원들에게 금지된 내부주식거래 및 차명계좌 운영에 따른 금융실명제 위반사례 등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하고, 그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금융권 종사자들에 대한 직업윤리교육을 강화하는 방안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