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박근혜 정부가 사드의 한국 배치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참여 등 민감한 외교 현안에 적절한 대응을 못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해 베이징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개회식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이관계자는 “현 정부 출범 초기 미국·중국과 관련해서는 ‘균형 외교’를, 일본·북한에 대해서는 ‘원칙 외교’를 통해 점수를 땄다면 이제는 그게 ‘무소신·무능 외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묘책을 찾아야 하는데 갈수록 벼랑으로 몰리는 형국인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하나하나가 모두 박근혜 정부 외교정책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큰 이슈들이라는 게 그의 근심을 더 크게 만드는 요인처럼 보였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가 처한 외교·안보 상황은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우선 ‘사드’의 한국 배치 움직임에 대해 중국이 노골적으로 불쾌감과 우려를 표하면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급기야 지난 17일 정부는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의 브리핑 형식을 통해 ‘내정간섭 불가’ 원칙을 재확인했지만, 중국 측의 압박은 여전하다. 심지어 외교부 안팎에서는 중국 정부가 주중 한국대사관을 통해 사드 배치 시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식의 위협성 메시지까지 전달했다는 주장도 흘러나오고 있다.
사드가 미군의 미사일방어체계(MD)와 마찬가지로 중국을 발끈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면 한국의 ‘AIIB’ 참여 여부는 미국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안이다. 미국은 불투명한 지배구조 등을 이유로 중국이 주도하는 AIIB에 반대해 왔고, 주요 동맹국과 우방국들의 AIIB 참여에도 드러내놓고 반대해 왔다. AIIB가 미국 중심의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일본 중심의 아시아개발은행(ADB) 체제 등에 중대한 도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드체계의 핵심인 X-Band 레이더.
사드의 한국 배치는 안보, AIIB 참여는 경제 이슈라는 점에서 둘은 전혀 상관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두 가지가 복잡하게 연동돼 한국 외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은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를 곤혹스럽게 한다. 사드와 관련해 그동안 박근혜 정부는 이른바 ‘3 No 원칙’을 견지해 왔다. ‘미국의 요청이 없었기 때문에(No request), 미국 정부와의 협의도 없었고(No consultation), 그러므로 결정한 것도 없다(No decision)’는 것이다. 미·중 양국의 충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은 채 결정을 미루는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해 온 것이다. 모호성을 전략으로 삼는 이런 기조는 AIIB 참여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돼 왔다.
이런 모호성 전략은 한동안은 균형 외교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임 이명박 정부가 미국 일변도 외교정책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갔던 것과 달리 미·중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이제 이런 모호성의 전략을 더 이상 끌고 가기 어렵게 됐다는 데서 박근혜 정부의 불행이 시작됐다.
중국은 3월 이내에 AIIB 참여 여부를 결론 내라고 압박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드 배치 결정 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한·중 관계가 펼쳐질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미국은 사드 배치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가면서 한국이 AIIB 참여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AIIB에 참여하든 안 하든, 사드를 배치하든 안하든 미·중 양국 중 어느 한쪽의 반발을 피할 수는 없는 셈이다.
미·중 슈퍼파워 사이에 끼여 등 터지는 격이 되다 보니 박근혜 정부가 속으로 품고 있었던 전략들까지 폐기처분될 위기에 처했다. 사드 배치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를 두고 벌써부터 논란이 일고 있는 게 단적인 예다. 외교·안보 분야에 정통한 소식통은 “정부 내에서는 진작부터 사드가 결국은 한국에 배치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가 먼저 나서서 사드 문제를 매듭짓지 않은 것은 그 자체로 전략이었다”며 “우리가 먼저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 했다면 중국 정부의 반발을 혼자 다 떠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미국 정부는 우리 측에 대놓고 사드 배치 비용의 분담을 요구해 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드는 1개 포대 당 적게는 1조 원, 많게는 2조 원대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주한미군이 미국 본토 방어를 위해 쓸 무기인 만큼 그 비용은 당연히 미국이 부담해야 한다는 우리 정부의 논리는 이제 협상 테이블에서 힘을 받기 어렵게 된 형국이다.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AIIB 참여 결정을 미룬 탓에 AIIB 내에서 높은 지분과 발언권을 확보하려던 구상에 차질이 빚어진 것도 박근혜 정부의 스텝이 꼬인 또 다른 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과 일본 간에 ‘신 밀월 기류’가 형성되고 북한과 중국이 관계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도 박근혜 정부 외교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4월 29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 총리가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한 전례는 없다. 아베 총리가 그 자리에 선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상징성을 갖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 문제로 격하게 대립할 때 한국 편을 들어 왔던 미국 정부의 기조에 중대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최근 내·외신 기자회견이라는 공개적인 자리를 통해 북·중 정상회담과 관련, “양측의 편리한 시기가 언제인지 봐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왕이 부장은 “중·북 관계는 기초가 매우 튼튼하기 때문에 특정 시기와 개별적인 일에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되며 받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미·일, 북·중 사이의 관계 개선 조짐은 한 손에는 미국을, 다른 한 손에는 중국을 잡고 각각 일본과 북한을 견제해 온 박근혜 정부를 당혹케 할 수밖에 없는 중대한 변화다. 자칫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 한국이 소외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교·안보 측면에서 한국이 복잡다기한 위기 상황에 처함에 따라 박근혜 정부의 전략 부재와 무능에 대한 비판 여론도 확산될 조짐이다. 전직 외교·안보 분야 고위 관료는 “방어 목적의 사드를 배치하는 결정을 대책 없이 미루면서 중국의 내정간섭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심각한 문제다. 애초부터 사드에 대해 중국 정부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며 “사드와 아무 상관도 없는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을 계기로 여권에서 먼저 사드 배치론이 제기되도록 이슈 관리를 제대로 못한 것도 결과적으로 미국과의 협상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 됐다”고 비판했다.
새누리당의 한 외교통 의원은 “아베 총리의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은 대미 외교전에서 한국이 일본에 패배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며 “일본이 막대한 자금력과 로비력으로 미국 정부와 정치권을 공략하고 있을 때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반성해야 할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