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잽 한번 맞았다고 전쟁선포 한 거냐’
이완구 총리가 지난 12일 “당면한 경제살리기와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부패를 척결하고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포하자 재계에서 나온 첫 반응이다. 기업비리 수사는 수시로 이뤄지는 것이고, 비리가 있으면 처벌해야 마땅하지만 집권 3년차로 접어든 청와대가 전방위로 ‘사정(司正)정국’을 만들고 있는 의도에 잔뜩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겉으론 느닷없이 날아온 돌에 맞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고 있지만, 속내를 들어보면 “도대체 누구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것이냐.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전경련회관 전경과 최경환 경제부총리. 기업들은 사정국면이 그동안 최 부총리가 강조해온 경제살리기와 배치된다며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이종현·박은숙 기자
“현재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수사대상 기업들은 대부분 직전 이명박 정부와 연관돼 있다. 부정부패 척결이 직전 정부의 흔적 지우기 차원에서 진행되는 게 통상적이라고 보면, 현 정부가 같은 정파의 직전 정부 인사나 관련 기업들을 손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명분이 약하다. 대부분 기업 인사들은 이번 사정이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을 펴낸데 대해 청와대가 유감을 표명한 지 두 달 가까이 지난 뒤 나온 데 주목하고 있다. 포스코 비자금과 자원외교 비리를 향해 속도를 내는 검찰 수사의 종착지가 결국 전 정권이라는 얘기다.”
10대그룹에 속하는 한 대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실제로 현재 검찰의 수사대상은 우선적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자원개발 비리와 비자금 조성에 맞춰지고 있다. 검찰의 압수수색이 진행된 한국석유공사, 경남기업 등이 1차 타깃이지만, 당시 자원개발투자가 진행됐던 사업 지역을 넓히면 관련 기업들은 10여 개로 늘어난다.
마다가스카르 니켈광산 투자에는 한국광물자원공사와 경남기업 외에 삼성물산과 현대컨소시엄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인터내셔널, 대우조선해양 등의 기업들도 거론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와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 사외이사 등으로 재직했었다.
자원개발 관련 기업뿐만 아니라 롯데, 신세계, 동부 등 대기업으로 계속 확산되면서 ‘MB 인맥 기업’이나 당시 정부에서 특혜를 받은 기업들이 사정권이라는 분석이 나돌고 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현 정부가 출범한 첫해에도 경제민주화 이슈와 함께 기업 사정 바람이 거셌다”면서 “검찰이 당시 수사를 벌였던 기업들을 상대로 재탕, 삼탕하려는 것 같다”고 비꼬았다.
이런 이유로 재계에선 정부가 20일 추경호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부정부패 척결 관계기관회의’를 열고 공공, 민생, 경제·금융, 3대 분야에서 우선 추진할 과제들을 선정한 것을 두고도 “공공, 민생은 끼워 넣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더욱이 재계는 이번 사정이 기업 길들이기 차원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임금 인상이나 법인세 인상 등 최근 정부가 추진한 각종 현안에 대해 재계가 반대 의사를 밝힌 데 대한 보복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경제단체장들과 간담회를 갖고 임금인상을 독려한 뒤 포스코 압수수색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고 강조하며 “비리가 있으면 단죄를 해야 하지만, 그 의도가 의심을 사는 상황이라면 기업들로선 순응하기 힘든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최 부총리는 지난 13일 경제부처 장관들과 ‘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장을 대동하고 경제5단체장(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을 만나 기업들의 임금인상을 독려했으나, 경제단체들이 난색을 표명하면서 사실상 거부당했다. 이후 최 부총리는 19일 박근혜 대통령의 중동 순방 성과를 설명하는 브리핑에서 “임금이 올랐으면 하는 정부의 바람이 있지만, 기업 단위에서 노사 간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라고 한 발 물러났다. 경제파트의 수장으로선 재계에 한 방 얻어맞아 ‘굴욕’을 당한 꼴이다.
기업들은 기업들대로 최 부총리에 대한 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재의 기업 사정 국면이 그간 최 부총리가 강조해온 경제살리기와 배치된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그가 기업들에 대해 ‘이중적인 관점’으로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최 부총리는 지난해 취임 이후 가계 소득을 올리는 방안으로 기업들의 배당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사내 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하는 기업환류소득세제를 도입했고, 이번에는 임금 인상을 독려하고 나왔다”면서 “그가 주장하는 소득주도의 경제성장은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정책 방향과 똑같다”고 지적했다. 최 부총리가 야당이 제기할 수 있는 경제 이슈를 선점해 정국을 주도하려다 보니 한쪽으론 경제활성화를 위해 기업 투자를 주문하고, 다른 한쪽에선 기업들을 옥죄는 상반된 정책을 구사하게 됐다는 것이다.
경제정책당국과 재계의 거리가 멀어지는 사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른 기업들은 벌써부터 유무죄를 떠나 이미지 추락이라는 리스크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검찰수사 대상에 든 한 기업 관계자는 “한마디로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다. 대관, 홍보 파트는 온종일 관련 정보를 하나라도 얻어내려 동분서주하고 있고, 인터넷에 뜨는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며 “비자금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게 없는데 ‘비리 기업’이란 딱지를 붙어버려 사업 구조조정은 물론 신규 사업 추진 등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일부 수사대상 기업들의 임원들은 언론사들을 직접 방문해 억울함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추경호 국무조정실장은 부정부패 척결 관계기관회의에서 “정부는 민생안정과 경제살리기를 위한 정책은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갈 것”이라며 “특히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매진하는 정상적인 기업활동은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과감한 규제혁파와 경제 구조개혁도 흔들림 없이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기업인은 드물어 보인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