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칼끝 힘조절
# 4일간 고조된 사정 확대 국면
지난 16일 저녁 신세계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을 검찰이 수사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이후 4일간 확대 재생산된 대기업 사정 태풍의 단초였다. 사실 신세계 총수 일가의 수상한 자금 흐름 규모가 70억 원에 불과해 포스코 다음 사정 타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대기업 사정 범위와 내용을 두고 추측이 무성한 가운데 검찰은 일각에서 제기하는 기획사정설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사진은 서울중앙지검 건물.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그러나 17일 상황은 급변했다. 포스코와 신세계에 이어 동부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은 물론 최대 20여 기업들이 사정대상이 될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오는 등 사정 국면 확대 일변도가 유지되자 검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검찰이 이를 진화하기 위해 “동부의 경우 서울중앙지검에 있는 여러 사건 중 하나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사정의 일환으로 동국제강 일가의 역외탈세 혐의도 추적중이란 보도가 나오면서 검찰과 출입기자단 간 신경전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사정이 아니라 서울중앙지검이 지난 몇 년간 가지고 있으면서 별로 진전된 게 없는 사건들이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반영이 안 된다”며 “재계에 잘못된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으니 자제해 달라고 요청해도 안 받아주는 건 너무 한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야말로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어 18, 19일에는 갈등이 더욱 첨예해져 검찰은 출입기자들과의 대화 통로를 차단하기도 했다. 그러다 19일 국내 유통업계 1위인 롯데쇼핑의 수십 억 원대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해 검찰이 수사하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온 뒤 검찰은 이대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듯했다. 이날 저녁 검찰의 한 간부가 출입기자들에게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내온 까닭에서다.
그는 메시지를 통해 “부패 척결은 검찰 본연의 사명이다. 그런데 최근 검찰 수사와 관련하여 단순한 의혹 수준이거나 수사가 진행되지 않은 사안까지 무차별적으로 수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우려스러운 상황”이라며 “검찰은 적법절차를 철저히 준수하고 ‘부정부패’라는 환부만을 도려내는 절제된 수사를 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어떤 측면에선 형식적인 문자메시지인 것 같지만, 이날 이후로 언론의 대기업 사정 확대 기류 보도는 사그라지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4일간 벌어졌던 검찰과 출입기자들 간 신경전 또한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난 셈이다.
# 검, ‘대기업 죽이기’ 오해 불식
어느 정부든 집권 중반에 본격적인 사정을 시작하면 언론은 사건을 확대시킬 수밖에 없다. 대선자금 수사처럼 실제로 사건이 확대된 경우도 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검찰이 이번에는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했을까. 이를 두고 ‘기획사정설’에 대한 경계인 동시에 청와대에 충성하느라 기업들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재계의 비판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요신문DB
다른 검찰 고위 관계자는 “기업 수사는 재계에 무언의 강한 압박으로 작용하는 만큼 현재 돌아가는 포스코, 방위산업, 자원외교 비리 등에 대한 수사만으로도 ‘투자확대나 임금인상 등 정부 요구에 충실하라’는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검찰이 모르겠느냐”고 반문하며 “따라서 명분 있는 수사를 위해선 수사 범위나 대상과 관련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당장은 수위 조절을 위해 검찰이 대대적인 대기업 사정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의혹들이 다시 떠오른 이상 신세계, 동부, 동국제강, 롯데 등에 대한 수사는 앞으로 속도감 있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도 최근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해 세월호 사건 등으로 인해 검찰 수사가 공백기였다”며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을 때부터 내사를 진행해서 검사들이 많은 자료를 축적한 상태”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포스코건설 수사가 진척이 잘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서울중앙지검에서 진행 중인 다른 사건 수사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포스코 수사가 장기화할 경우 검찰로서는 당분간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뭔가 새로운 사건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며 “4월 중순이 그 고비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검찰이 정동화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면서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수사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기는 했다. 하지만 비자금 조성에 정준양 전 회장 등 ‘윗선’이 개입했고 정·관계 로비에 비자금이 사용됐다는 것을 규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롯데, 신세계, 동부, 동국제강 사건 등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지난 28일 동국제강 본사를 압수수색하는 등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서울중앙지검에서 접시(사건)가 여러 개 돌아가고 있는 만큼 적절할 때 개별 사건들이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이미 물밑 수사를 통해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등 회사 경영진이 해외 법인을 통해 물품 대금을 부풀리는 형식으로 100억 원대의 회사 돈을 빼돌린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