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인기를 얻었던 SBS <올인>에선 제주도의 수려한 풍광 등 볼 만 한 배경도 시청률에 한몫했다. | ||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SBS 드라마 <올인>의 주 촬영지인 제주도 섭지코지가 일약 최고의 관광명소로 떠오른 것이 가장 단적인 예다.
뿐만 아니라 대하드라마 <왕건>의 촬영지인 문경새재, <겨울연가>의 용평, 남이섬 등이 모두 비슷한 경우다.
이러한 ‘촬영지 대박’ 뒤에는 일명 ‘로케이션 매니저’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숨어 있다. 드라마의 스타일에 맞는 적절한 촬영지를 찾기 위해 신이 닳도록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장소 섭외를 둘러싸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케이션 매니저는 대략 30여명. 이들은 한때 일명 ‘헌팅맨’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소를 ‘헌팅’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최근에는 ‘로케이션 매니저’라는 말이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
예전에는 드라마 촬영지에 대한 인식이 적었기 때문에 단순히 촬영비를 주면 장소를 빌릴 수 있었지만 요즘엔 상황이 사뭇 다르다. 아무리 많은 촬영비를 준다고 해도 꺼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서로 촬영지로 선정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드라마 촬영지의 중요성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다.
로케이션 매니저들은 드라마의 시놉시스 단계부터 참여한다. 때로는 이 과정에서 주인공의 직업 자체가 바뀌기도 한다. 애초에 주인공의 직업이 의사였다고 하더라도 드라마의 분위기상 병원 내에서의 ‘그림’보다 자연의 모습이 더 강조되는 것이 좋다 싶으면 ‘전원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로 바뀌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로케이션 매니저가 덩달아 바빠질 수밖에.
현대물에서 로케이션 매니저들이 가장 자주 섭외를 해야 하는 세곳은 집, 회사, 카페 등이다. 일단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 있을 것이고 생활하는 주거 공간이 있어야 하니 당연히 회사와 집이 촬영지 섭외의 1순위. 여자 주인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둘이 자주 만나는, 카페와 같은 공간도 미리 섭외해 놓아야 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섭외가 힘든 곳이 바로 집. 남자 주인공의 집안이 대개 부잣집인 관계로 평창동이나 성북동 등의 대저택을 주로 섭외하는데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유층인 관계로 자신의 집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 또 아무리 많은 촬영비를 준다고 해도 ‘그 돈보다 정원 관리비가 더 들어간다’며 거부하기가 일쑤라는 것.
이럴 때는 일주일에 3∼4번씩 집을 찾아가 삼고초려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끝내 ‘대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정치인들의 집은 ‘불문곡직’하고 섭외가 불가능하다고.
▲ KBS <겨울연가>에서 배용준-최지우 커플은 설경 이 아름다운 용평을 배경으로 사랑을 가꿔나갔다. | ||
그러나 섭외가 완전히 결정되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과연 회사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는가’하는 점이 관건. 회사 홍보실에서는 미리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까지 주도면밀하게 검토한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바람둥이거나 사기성이 농후하고 인격적으로 지탄받는 캐릭터라면 회사에서도 꺼릴 수밖에 없다. 물론 드라마는 허구에 불과하지만 대중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
어떤 PD, 어떤 배우가 나오느냐도 섭외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 장소를 대여하는 회사로서는 충분한 홍보효과를 노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청률이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략 ‘스타급 PD’라고 할 수 있는 윤석호, 이창수, 김종학 PD 등이 드라마를 찍는다고 하면 두말없이 OK한다고.
호텔의 경우에는 주연 배우가 돈 많은 재벌 2세 역을 맡아 투숙하거나 드나드는 장면보다는 아예 평범한 직원으로서 근무하는 경우에 더 협조를 잘해준다고 한다. 부유한 재벌 2세가 호텔을 자주 이용하면 일반인들에게 해당 호텔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왜곡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성실한 직원으로 등장하면 호감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지방 촬영지 섭외의 경우 각 지방자치단체끼리 경합이 붙기도 한다. 촬영지가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지자체의 관광수입 규모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치열한 로비전이 벌어진다는 것. 특히 일부 지자체 공보실에서는 드라마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로케이션 매니저는 드라마의 무대이자 배경인 촬영지를 전반적으로 컨트롤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직책임에 틀림없다. 반면 그만큼 힘든 직업이기도 하다.
13년간 로케이션 매니저를 해온 유영집씨(36). 그간 KBS <목욕탕집 남자들>, <겨울연가> 등을 통해 업계에서는 ‘베테랑’의 입지를 굳혔다. 그런 그도 항상 장소 섭외가 쉬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유씨는 “미니 시리즈가 한번 시작되면 일주일에 3∼4일은 집에 못들어간다고 보면 된다”며 “섭외가 완전히 끝났더라도 갖가지 돌발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아 늘 대기 상태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꽃길을 봐두었는데 장마철에 비가 내려 꽃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고, 사무실을 섭외한 후 막상 촬영을 하러 갔더니 느닷없이 리모델링을 하고 있어 공수표만 남발한 셈이 되고 만 적도 있었다고 한다.
드라마라고 하면 흔히 어떤 배우들이 출연하는가에만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 ‘공간의 마술사’인 로케이션 매니저들이 없다면 드라마를 촬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들은 오늘도 새로운 무대를 찾기 위해 지방의 오지에서부터 서울의 구석구석까지를 발로 누비고 있다.
이남훈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