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에만 서면 ‘건방진놈’으로 변신”
우승을 차지한 OK저축은행 김세진 감독과 선수들이 감격에 겨워 얼싸안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OK저축은행은 지난 1일 안산 상록수체육관에서 열린 ‘NH농협 2014~2015 V-리그 남자부 챔피언결정전’ 3차전에서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에 세트스코어 3-1(25-19, 25-19, 11-25, 25-23)로 승리했다. 3차전을 치르는 동안 한 세트만 내주는, 완벽에 가까운 경기력을 보인 OK저축은행은 삼성화재의 챔피언결정전 8연패를 저지하며 창단 첫 챔피언의 감격을 누렸다. OK저축은행의 리더는 김세진 감독. 김 감독은 팀을 맡은 지 2년 만에 난공불락이자, 친정팀인 삼성화재를 상대로 멋진 승부를 펼쳤고, 결국엔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파노라마 같은 김 감독과의 인터뷰 파일 속에서 위대한 도전과 성공의 비밀을 풀어봤다.
김세진 감독은 선수로선 월드스타였지만, 감독으로선 물음표가 많은 지도자였다. 코치 경험 없이, 오랫동안 해설위원으로 코트 밖에서 활동했던 그가 창단팀의 감독을 맡았을 때 김 감독을 향한 시선이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 또한 자신이 감독으로선 ‘아직’ 자질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감독을 맡고 선수들 훈련을 시작할 무렵 기자와 만난 김 감독은 당시 이런 얘기를 털어놨다.
“내가 젊은 감독으로 꼽히지만, 선수들과는 나이 차이가 꽤 난다.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기란 어렵다. 그러나 진심은 통한다고 믿는다. 어린 선수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내가 갖고 있는 색깔을 천천히 보여주고 싶다.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남들이 하지 않는 일, 쉽게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해서 가는 경우가 있었다. 국가대표도 최연소로 들어갔고, 창단팀 선수로 시작해서 창단팀 감독이 되었고, 코치 경험 없이 감독이 된 것도 내가 처음이다. 마치 총대를 메고 가는 게 내 운명처럼 느껴진다.”
지난 2일, 3연승으로 삼성화재를 꺾고 우승을 확정지은 김 감독은 자신의 지도력에 대해 “건방지게 들릴 수 있지만, 난 선수시절부터 지금까지 배구의 패러다임을 바꿔왔다”며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2년 전 자신의 지도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던 김 감독의 모습과는 대비될 수밖에 없었다.
우승 메달을 목에 건 김세진 감독.
창단 이후 김 감독이 자질 부족이라고 했던 지도력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김 감독이 OK저축은행 감독을 맡은 배경에는 ‘창단팀’이란 신선함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김 감독은 OK저축은행과 인연을 맺은 과정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프로팀 감독 제의를 받았지만, 하고 있는 일들이 많은 탓에 그 일들을 포기하고 감독직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러시앤캐시(현 OK저축은행)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는 창단팀이란 단어에 닫힌 마음이 스르륵 녹아들어갔다. 누가 이끌었던 팀이 아닌 신생팀에서 내가 생각했던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는 유혹이 무엇보다 강하게 날 끌어들였다.”
남들이 안 하는 것, 신선한 것, 그러면서 새로운 일에 관심을 쏟고 있는 김 감독과 OK저축은행의 만남은 운명이었던 셈이다.
3차전이 열리기 전, 김세진 감독을 만난 장소는 경기장 밖 흡연 장소였다. 경기를 앞둔 김 감독의 심정이 궁금했다. 그는 “별다른 것 없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잘했다. 설령 3차전에서 패해 4, 5차전까지 간다고 해도 만족한다. 선수들에게 이기려 하지 말고 (챔피언결정전을) 즐기고 재미있게 하라고 얘기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기자에게 속마음을 숨겼다. 그의 진심은 우승이었다. 우승 직후 ‘삼성화재를 상대로 3연승 우승을 예상했느냐’고 묻자 돌아온 그의 대답 속에 그 진심이 묻어났다.
“난 어느 팀과 붙어도 이길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전날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니면 잠자리에 들 때, 다양한 시나리오를 끄집어내지만, 스코어는 절대로 계산하지 않는다. 매 순간 위기를 겪고, 매 순간 그 위기를 극복해가야 하는 상황이라 선수들의 컨디션을 점검하면서 경기를 이끌어간다. 오늘도 이길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2세트를 앞서다가 3세트에 확 떨어지기에 자칫하면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전 선수들을 다 뺐다. 상대팀 흐름에 끌려가기 싫어서. 그래서 욕을 먹기도 하지만, 이것은 내 방식이다.”
그는 우승을 위해 3세트에서 주전 선수를 다 빼는 무리수를 두며 4세트를 준비했고, 결국 4세트를 이기며 세트스코어 3-1로 승리, 3차전에서 우승을 확정지었다. 김 감독은 기자에게 “어느 감독이 우승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그걸 잡고 싶은 마음이 없겠느냐”고 반문하며 “나도 욕심이 났다. 어렵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꼭 잡고 싶었다. 그러나 경기 전에는 철저히 그 마음을 감추고 싶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게 노출되면 가장 부담을 느끼는 사람은 선수들이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OK저축은행이 우승을 확정 지은 직후 김세진 감독이 기뻐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 감독이 헹가래를 받는 모습. 사진제공=OK 저축은행
김 감독은 신치용 감독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애제자였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끼’도 많고, 해설을 하면서 개인사업을 병행했던 김 감독이었지만, 신 감독은 “김세진이야말로 감독을 하게 되면 나보다 더 팀을 잘 이끌어 나갈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김 감독이 OK저축은행을 맡을 당시에도 신 감독은 “삼성화재를 가장 괴롭힐 수 있는 감독이 나타났다”며 제자의 감독 데뷔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격려해줬다.
김 감독은 신 감독 밑에서 10년 이상 선수생활을 하며 스승의 지도력과 생활 면면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봤다. 은퇴 후에도 자주 신 감독을 찾아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고, 해설위원 시절에는 신 감독과 배구를 바라보는 시선을 공유하며 ‘배구 지도 9단’ 스승의 DNA를 배웠다. 김 감독은 자신의 지도 스타일이 신 감독한테서 나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이 있다고 강조했다.
“신 감독님은 아주 냉정한 분이다. 그런 분 밑에서 나도 독하게 컸다. 팀이 연패에 빠졌을 때,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감독님을 떠올렸고, 감독님이 어떻게 그 과정을 극복해 갔는지 기억해냈다. 내가 감독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좀 더 건방지고, 앞뒤 안 재고, 덤벼드는 부분이다. 이 점이 젊은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우리 팀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 비록 우승은 했지만 난 단 한 번도 삼성보다 우리의 전력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챔피언결정전에 임했다. 나는 도전하는 입장이라 부담이 없었지만, 감독님은 조금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김 감독은 조만간 신치용 감독과 편한 자리를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상대팀 감독이 아닌, 이전의 스승과 제자로 돌아가 시즌을 마친 뒤풀이를 하고 싶다고 했다. 우승을 했음에도 스승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은 김 감독이다. 프로배구는 오랜만에 OK저축은행의 우승으로 다양한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막내 팀, 막내 감독의 유쾌한 도전과 반란이 내년 시즌에도 계속되길 기대해본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최태웅 감독 선임 깜짝쇼 앞뒤 신 감독과 ‘아이들’ 맞대결 기대하시라 OK저축은행의 우승이 확정된 다음날, 현대캐피탈은 플레잉코치로 활약했던 최태웅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플레잉코치였지만 ‘코치’보다는 ‘플레잉’에 무게를 두고 시즌을 치른 최태웅의 감독 선임은 한마디로 ‘깜짝쇼’나 다름없었다. 현대캐피탈은 최태웅 코치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했다. 최태웅 감독이 현대캐피탈을 맡게 되면서 배구계는 삼성화재 출신 선수들의 지도자 데뷔가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이다. 무엇보다 김세진 감독이 창단팀을 2년 만에 우승으로 이끌면서 ‘삼성 DNA’에 대한 배구계의 신뢰가 뿌리를 내렸고, 나이 많은 감독보다는 젊은 지도자들에게 기회를 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신치용 감독이 강하게 은퇴를 만류했던 ‘돌도사’ 석진욱은 OK저축은행의 수석코치를 맡아 창단부터 우승을 한 지금까지 김세진 감독과 완벽한 호흡을 선보였다. 최태웅 감독 선임으로 다음 시즌 프로배구는 신치용 감독과 그의 ‘아이들’이 펼칠 맞대결을 보는 재미가 쏠쏠해졌다. 1997년부터 2004년 2월까지 삼성화재 코치로 있으며 신치용 감독을 보좌했던 한국전력 신영철 감독도 만년 하위팀으로 분류되던 한국전력을 올 시즌 정규리그 3위에 올려놓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신 감독은 지난 1일 한국전력과 2년 재계약을 맺었다. 최태웅 신임 감독의 등장으로 프로배구 남자부 최연소 사령탑은 41세 김세진에서 39세 최태웅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 [영] |
절친 김상우가 본 챔프전 “워낙 감 좋아 사고칠 줄 알았다” 김세진 감독의 삼성화재 동기이자 ‘절친’인 김상우 KBSN스포츠 해설위원은 OK저축은행의 우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상우 KBSN스포츠 해설위원. 일요신문 DB “일단 선수 구성 자체가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외국인선수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 또한 실력이 뛰어난 젊은 세터, 이민규의 가세가 팀 전력에 큰 도움이 됐다. 경기대 3인방인 송명근-송희채-이민규는 시리즈 내내 제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첫 우승을 합작했다. 젊은 선수들과 함께 김세진 감독이 자신의 색깔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챔피언결정전에서 보인 OK저축은행 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문득 삼성화재 초창기 시절이 떠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배구에 미쳐서, 경기에 몰입했던 그 순간들이 OK저축은행 선수들의 플레이와 오버랩됐다. 져도 본전이었던 만큼 부담 없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실력 발휘를 다 해보였던 무대였다.” 김 위원은 삼성화재의 패인에 대해선 “레오의 부진이 뼈아팠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화재는 단기전에 강한 팀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외국인선수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는데, 레오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규리그에서의 모습과 챔피언결정전에서의 실력에 큰 차이를 드러냈다. 상대팀 시몬의 파상 공세에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이선규는 아예 점프가 되지 않더라. 레프트로 나온 류윤식의 공격력이 너무 약했다. 삼성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난 챔프전이었다.” 그렇다면 삼성화재는 앞으로 어떠한 변화의 바람을 맞이하게 될까. 김 위원은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삼성이 오랫동안 드래프트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선수를 뽑다 보니 제대로 된 선수 수급을 하지 못했다. 선수 구성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챔피언결정전에서 뛴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우승 경험이 있는 선수들이 없다. ‘명가’ 삼성화재답지 않은 선수 구성이었다. 그만큼 뛸 선수가 없다는 얘기다. 이를 계기로 삼성이 명가 자리를 유지하려면 좋은 선수 보강이 가장 시급하다.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라고 해도 좋은 선수들이 없으면 좋은 팀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경기였다.” 김 위원은 친구 김세진 감독에 대해 “워낙 ‘감’이 있는 친구라 언젠가 한 번은 큰 사고 칠 줄 알았는데,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랐다”면서 “시즌 중에 자주 만나서 술잔을 기울였기에 누구보다 김 감독의 고민을 잘 알고 있다. 우승이란 결과가 그동안 그 친구의 고생을 값지게 만들어준 것 같아 다행이다. 친구로서 대견할 따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