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뉴얼 비용 무기한 무이자 할부로 받아라” 이런 얘기?
이마트가 PL상품의 리뉴얼 비용을 납품업체에 부담시킨 후 납품원가 인상을 통해 그 비용을 돌려받게 하고 있다. 일요신문DB
대형마트 업계가 지난 수년간 성장 정체에 시달리고 있지만 PL상품만은 점점 더 그 품목이 다양해지고 매출도 증가하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 중 PL상품으로 가장 큰 재미를 보고 있는 곳은 이마트다. 홈플러스와 롯데마트도 PL상품을 선보이고 있지만 유통업계에서는 이마트의 PL상품이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마트에 따르면 2006년부터 출시한 이마트의 PL상품 매출은 현재 이마트 전체 매출의 21~23%를 차지하고 있다. 홍삼, LED(발광다이오드), 비타민C, 유산균 등 품목도 다양해져 현재 1만 8000개에 달하는 PL상품이 이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다. PL상품만으로 설·추석 명절 선물세트를 비롯해 각종 선물세트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다.
PL상품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이마트는 PL상품의 기획과 구성, 디자인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미지 개선과 매출 신장을 이끌기 위해 ‘PL상품 리뉴얼 작업’도 실시한다. 이마트 관계자는 “PL상품 고급화 차원에서 상품·디자인 리뉴얼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협력업체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마트는 최근 대규모 ‘PL상품 리뉴얼 작업’을 실시했다. 이마트가 이번 ‘PL상품 리뉴얼 작업’에서 주력한 부분은 포장 디자인. PL상품의 디자인을 대폭 교체하고 새롭게 단장해 분위기를 바꾸고 경기 침체에 따른 매출 하락을 조금이나마 극복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일부 협력업체 사이에서는 이마트가 기획·진행하는 PL상품 리뉴얼 작업이 또 다른 형태의 ‘갑질’이라는 비난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유는 이렇다. 이마트의 PL상품을 제조·납품하는 협력업체들은 이마트의 기획에 따라 PL상품 디자인이나 포장 방식 등을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 이마트 관계자는 “협력업체들과 협의해서 결정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협의가 아닌 ‘통보’일 가능성이 짙다. 한 협력업체 관계자는 “이마트의 기획에 따르지 않으면 PL상품을 제조·납품하기 힘들지 않겠느냐”며 “이마트로서는 다른 업체를 선정하면 그만”이라고 전했다.
협력업체들이 가장 큰 불만을 갖고 있는 부분은 상품 리뉴얼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즉 새로운 디자인이나 포장 방식 변경에 따른 비용을 협력업체들이 전부 부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마트의 기획에 따라 진행하는 디자인 리뉴얼 작업임에도 업체마다 적게는 1000만 원부터 많게는 수천만 원에 이르는 비용을 해당 업체가 모두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앞의 협력업체 관계자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수천만 원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이 큰 부담”이라며 “이마트에서 하라고 한 일에 대해 우리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이마트는 PL상품 리뉴얼 작업 비용을 해당 업체가 전부 치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제품 원가에 리뉴얼 비용을 반영해주는 방식으로 보전해주기 때문에 전가는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마트 관계자는 “발생한 비용만큼 원가를 높여 처리해주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 다 치르는 것”이라며 “말하자면 일시불을 할부로 돌려주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가령 PL상품을 제조·납품하는 A 업체가 PL상품 디자인 리뉴얼 비용으로 3000만 원이 들었다면, 이마트는 원가 500원짜리 A 업체의 PL상품을 원가 1000원으로 인상해 리뉴얼 비용을 처리해준다. 이런 식으로 A 업체의 디자인 비용 3000만 원이 모두 해결되면 원가를 다시 500원으로 내린다. 납품 원가를 한시적으로 인상해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이마트 말마따나 업체가 먼저 부담한 디자인 비용을 이마트가 모두 치르는 것이다. 하지만 업체로서는 이마트에서 상품이 그만큼 판매돼야만 먼저 지불한 디자인 비용을 채울 수 있다. 상품 판매가 더디면 더딜수록 그만큼 디자인 비용을 늦게 돌려받는 것이다. 다른 협력업체 관계자는 “원가가 올라가면 소비자 가격이 인상되고 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의 부담으로 돌아간다”며 “또 가격이 비싸지면 상품 판매가 줄어 재고회전율이 나빠진다”고 털어놨다.
말하자면 디자인 리뉴얼 작업 비용은 이마트가 치르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인상된 PL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치르는 것이다. 업체 입장에서도 재고회전율이 나빠져 디자인 비용 회수가 더딜 수밖에 없다. 이마트 관계자는 “포장 비용도 원가에 반영되는 부분이기에 일부 상품의 가격이 인상될 수는 있다”면서도 “그러나 주문한 수량만큼 받아들이기 때문에 업체들의 재고회전율이 나빠질 이유는 없다”고 반박했다.
이마트와 협력업체들의 공방의 핵심은 이마트 측 표현을 빌리면 ‘일시불-할부’다. 이마트가 기획안 일을 업체들이 일시불로 먼저 처리하면 이마트가 이를 할부로 갚아주는 식이다. ‘을’인 업체들은 대부분 중소기업인 탓에 수천만 원이라는 액수가 부담스럽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연간 매출 10조 원이 넘는 ‘갑’ 이마트에 수천만 원은 작은 돈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쪼개서 ‘상환’해주겠다는 심산이다. 더욱이 이마트의 할부 상환 방식은 기한이 정확히 정해지지 않은 데다 무이자다. 업체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태 디자인 비용을 회수하지 못한 협력업체가 부지기수다.
이마트 관계자는 “경기 침체로 대부분 상품 판매가 저조한 상황”이라며 “디자인 리뉴얼 작업 후 일부 PL상품 판매 역시 계획과 달리 저조하자 업체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마트 PL상품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직접 강조하는 기획 상품이다. PL상품과 관련해 수시로 현장점검까지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정 부회장의 현장점검이 판매 현황에 그쳐서는 안 될 듯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