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거절당한 후…‘세상에 사랑에 구걸 말자’
홍승만이 수감 생활을 했던 전주교도소 전경.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모범수로 통했다.
“잠깐만요. 사체 나왔다고 해서요!”
지난 4월 29일 4시 30분, 전북 전주교도소 관계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렀다. 경남 창녕군 장마면 산지리에 위치한 성지산 중턱에서 홍승만의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교도소에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일요신문> 취재진이 찾은 전주교도소는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차들로 북적였다. 교도소 관계자는 “상황이 정리돼서 파견 나갔던 직원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본부에 보고를 해야 해서 정신이 없다”고 밝혔다. 약 3시간 뒤 창녕경찰서 강력반 관계자는 “현재 시신은 영산요양병원에 임시로 안치됐다. 홍승만의 셋째형이 이쪽으로 오는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사건의 발단은 ‘귀휴’였다. 귀휴는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재소자가 출소하기 직전 일정한 사유에 따라 잠시 휴가를 얻어 교도소 밖으로 나오는 제도다.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6개월 이상 복역한 수형자로 형기의 3분의 1이 지나고 교정성적이 우수하면 1년 중 20일 내에서 귀휴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징역 21년 이상을 선고받은 유기수 또는 무기수는 7년을 복역해야 한다. 교도소 내의 귀휴심사위원회가 귀휴 여부를 결정하는데 교도소장이 위원장을 맡고 부소장, 외부위원 등 6∼8명으로 구성되며 재적위원 과반수가 출석, 출석위원 과반수가 찬성하면 의결된다.
홍승만은 1995년 내연녀를 목 졸라 살해하고 금품과 통장을 절취한 뒤 그 시신을 불태운 혐의로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범행 당시 강도 살인 미수죄로 7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 4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그 뒤 19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자격증을 따고 검정고시를 보는 등 모범적으로 생활해 귀휴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들은 홍승만의 수배전단(위)과 도주 당시 버스·역사 등에 설치된 CCTV에 포착된 모습.
하지만 ‘사고’가 터졌다. 복귀하기로 했던 홍승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귀휴 첫날인 17일, 그는 서울 송파구 송파사거리 인근의 큰형 집으로 향했다. 이튿날, 경기도 안양에서 지인을 만났고 그날 저녁엔 가족이 있는 경기도 가평에서 묵었다. 셋째 날엔 자신의 어머니가 사는 경기도 하남으로 이동했고, 복귀 전날 다시 서울 송파구의 큰형 집으로 향했다. 복귀 당일인 21일 홍승만은 오전 7시 30분에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두절됐다.
혹시 펜팔 ‘애인’에 대한 청혼이 거절된 탓일까. 홍승만은 큰형과 함께 20일 오후 6~7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인 사이로 발전한 A 씨의 경기도 안양시 자택을 찾았다. 홍승만은 A 씨에게 “혼인신고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A 씨는 “무슨 소리냐, 하지 않겠다”며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승만은 화상 면회를 통해서도 이미 A 씨에게 청혼을 했던 듯하다. 홍승만이 혼인신고에 매달린 이유 중 하나는 ‘가석방’이었다. 교정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재소자가 혼인신고를 했을 경우 보호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가석방이 빨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전주 완산경찰서 관계자는 “교도소와 공동수사 중이지만 편지 내용을 우리도 모른다. A 씨가 공개를 원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홍승만의 면회기록 분석결과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영치금을 넣어주고 면회도 자주 왔다”며 “A 씨를 종교단체에서 소개시켜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연락이 두절된 21일 오전 7시경, 홍승만은 다급한 걸음으로 송파사거리에서 택시를 타고 청량리역으로 이동, 기차를 타고 강원도로 향했다. 이틀 동안 강원도에 머물다 23일 동해에서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행. 부산에 잠입해 도시철도 범어사역 인근의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을 정도의 여유도 보였다. 그가 묵었던 방에선 지문이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치밀함도 드러냈다.
이날 전주교도소는 홍승만에 대한 수배전단을 전국에 배포해 그를 공개수배하며 현상금 1000만 원을 걸었다. 이때부터 홍승만이 가는 곳마다 경찰은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고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홍승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의 수사망을 유유히 벗어났다. 24일에는 부산시 금정구 남산동 일대 거리를 배회했고 울산시 울주군 언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오후 3시경 경남 양산시외버스터미널 앞 횡단보도에서 홍승만의 행적이 확인됐다. 25일엔 양산시 장마면에 위치한 통도사 입구에서 홍승만은 B 씨(여·78)를 만났다. 그는 넘어지려던 B 씨를 돕다가 그녀가 경남 창녕군의 한 사찰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사찰에서 며칠만 지낼 수 없겠느냐”고 물어 B 씨의 허락을 받아냈다.
홍승만은 B 씨와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경남 창녕군에 위치한 성지산으로 향했다. 사찰에서 그는 TV와 이불만 있는 작은 손님방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틀 뒤인 27일 오전 10시경, 홍승만은 B 씨에게 “등산 가도 되겠다”며 사찰 뒤편으로 올라간 뒤 자취를 감췄다. 홍승만이 돌아오지 않자 B 씨는 자신의 사위를 통해 인근 경찰서에 실종 신고했다.
경찰들이 홍승만의 시신을 옮기는 모습. YTN 뉴스 화면 캡처.
경찰은 법무부와 공조해 500여 명을 동원해 성지산 일대를 전격 수색했다. 결국 29일 오후 4시경 홍승만의 시신을 찾았다. 자신의 바지로 나무에 목을 맨 채 숨진 상태였다. 발견 당시 홍승만은 청색 계열 티셔츠와 속옷 하의만 입고 있었다. 전주교도소 관계자는 “유족이 부검에 동의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부검을 마쳤다”고 밝혔다. 30일 오후 2시 홍승만의 시신은 경남 통영시 정량동 통영공설화장장에서 화장됐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
홍승만 무기징역 선고받은 사건은? 출소 4개월 만에 내연녀 살해 홍승만은 27세이던 지난 1995년 11월 29일 경기도 하남시 신장1동에서 내연녀 김 아무개 씨(여·당시 44)의 집에서 김 씨를 살해했다. 흉기를 들이대며 위협하고 스타킹으로 김 씨의 손과 발을 묶은 뒤 숨을 거둘 때까지 넥타이로 목을 조르는 등 수법도 잔인했다. 당시 증거 인멸을 위해 사체를 이불로 덮고 불을 붙여 시신의 일부를 태웠다. 심지어 그는 김 씨가 몸에 지니고 있었던 금목걸이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 핸드백에 들어 있던 예·적금통장 3개와 도장을 훔친 뒤 267만 원을 인출해 유흥비로 탕진했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홍승만의 범행에 대해 살인, 절도, 사체손괴, 현주건조물방화미수,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사기죄를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홍승만은 형이 무겁다며 항소했다. 숨진 김 씨가 자신을 유혹해 성관계를 갖고 무리한 동거를 요구하며 이에 불응하면 동네에 소문을 내겠다고 위협해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이를 배척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홍승만은 20세 때인 1988년 강도 살인 미수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아 1995년 출소한 상황이었다. 불과 4개월 만에 범행을 저질러 이 점도 양형에 반영됐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