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 치솟자 ‘주판알 튕기기’
인수합병 시장에 나온 증권사들의 매각 작업이 순탄치 않다. 증시 활황으로 크게 오른 기업 가치가 되레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대우증권 전경.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해까지만 해도 실적 악화에 신음하며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던 증권사들은 올해 주식시장이 활발히 움직이면서 큰 폭의 실적 개선이 예상되고 있다. 올 들어서만 주가가 2배 이상 폭등한 유진기업의 주가 상승 이유 중 하나로 “유진투자증권의 실적 개선”이 꼽힐 정도다.
코스피·코스닥지수 상승과 실적 개선이 맞물리면서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는 증권사들의 주가는 무섭게 상승했다. 증권사들의 주가는 연초와 비교해 적게는 70%, 많게는 2배 이상 올랐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금리 인하, 거래대금 증가 등으로 증권사들이 수년간의 침체에서 벗어나는 듯하다”며 “무엇보다 실적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증권사는 최근 주가 상승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처지다. 매각을 계획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가 폭등은 오히려 발목을 잡힐 수 있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대우증권이다.
산업은행이 43% 지분을 보유해 대주주로 올라 있는 대우증권은 연초 대비 주가가 70~80% 급등해 매각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연초 9000원대였던 대우증권 주가는 최근 1만 6000~1만 7000원대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대주주인 산업은행과 금융위원회는 올해 대우증권 매각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었다. 올 초 금융위는 대우증권의 연내 매각 방침을 전달한 바 있다. 고승범 금융위 사무처장은 지난 1월 29일 2015년 업무계획 브리핑에서 “올해 안으로 대우증권 매각 일정을 정해 추진하려 한다”고 말했다. 비록 홍기택 산업은행 회장이 대우증권 매각에 대해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알렸지만 금융위는 홍 회장과 산업은행에 대우증권 연내 매각 방침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대우증권 지분에 대한 가치는 대우증권 주가를 반영해 약 1조 5000억 원이었다. 여기에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더하면 대우증권 매각 가격은 1조 7000억~1조 8000억 원, 아무리 크게 잡아도 2조 원이 넘지 않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대우증권 주가가 폭등하면서 산업은행 지분 가치만 이미 2조 3000억 원에 달한다. 나아가 매각 가격이 3조 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KB금융그룹, 신한금융지주 등 대우증권 인수 후보자로 거론된 금융사들이 인수전 참여에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증권 매각이 늦어지고 있는 점도 대우증권 매각을 불투명하게 하는 요인이다. 산업은행은 오는 5월까지 현대증권 매각을 완료한 후 대우증권 매각 작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대증권 매각 주관사인 산업은행과 인수 우선협상대상자인 오릭스프라이빗에쿼티(PE)의 본계약이 늦어지는 등 현대증권 매각 작업이 원래 계획보다 지연되고 있다. 현대증권 역시 실적이 개선되고 주가가 큰 폭으로 오른 탓이다. 현대그룹이 자구계획안 일환으로 현대증권 매각을 결정할 당시 증권업계 침체를 감안해 ‘누가 사겠느냐’던 우려의 목소리가 컸지만 지금은 현대증권 매각을 결정한 현대그룹과 현정은 회장이 배 아파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일부에서는 산업은행이 대우증권 매각 방침을 아예 철회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산업은행이 대우증권을 품에 안은 채 주식시장 활황을 누릴 것이라는 얘기다. 지난 2007년에도 산업은행은 대우증권을 “초대형 금융투자회사로 육성하겠다”며 대우증권 매각 방침을 철회한 바 있다.
그러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한 국책은행 관계자는 “국책은행은 손해를 보면 세금을 축낸다고, 이익을 보면 국책은행이 이익을 추구한다고, 이래저래 지적받는 곳”이라고 말했다. 한 M&A 전문가는 “기업 가치에는 늘 불확실성이 존재하게 마련”이라며 “나중에 더 좋아질지 아니면 예전보다 더 나빠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전했다.
산업은행이 대우증권 매각 방침을 또 다시 철회할지, 결국에는 매각할 수밖에 없을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올 초 밝혔던 ‘연내 매각’은 어려울 것이라는 데 점점 더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대우증권을 인수하면 단숨에 업계 1위에 오를 수 있지만 불과 몇 개월 만에 몸값이 치솟은 상태에서 선뜻 인수하겠다고 나설 곳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