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싶으면 통장 가져와” 불법이 관행으로…
평생을 건설 노동자로 살아온 최 아무개 씨(61)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난해 7월, 최 씨는 지방의 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전기 트레이 설치 작업을 했다. D 사의 ‘전기배선작업·숙식제공·일당 9만 원’이라는 구인 광고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장 현장으로 내려가 일을 시작했지만 그 다음날, 현장관리자인 ‘팀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일을 계속하려면 근로계약서에 적은 계좌와 다른 통장과 체크카드를 새로 만들어 가져와야 한다는 것.
이는 엄연히 불법이다. 올해 개정된 전자금융거래법에 따르면, 대포통장을 양도한 사람은 최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 받을 수 있다. 불법임에도 건설업계에는 대포통장을 사용하는 잘못된 관행이 만연해 있다. 일부 노동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통장과 체크카드를 팀장에게 넘기는 일이 부지기수다.
최 씨는 통장을 만들 수 없다고 끝까지 항의했지만 결국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팀장에게 새 통장을 ‘상납’해야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은 이미 다 만들었더라구…. 팀장이 그걸 싹 거둬서 관리하는 거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 씨는 D 사와 근로계약을 했지만 팀장이 실질적인 임금 지급자였다. 팀장들은 원청과 하청업체와 노동자 사이를 중개하고 임금을 지급하는 역할을 한다. 과정은 이렇다.
팀장들은 전기공 등 10~20명의 노동자들을 모아 팀을 꾸려 전국의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며 하청업체를 상대로 일감을 따낸다. 대형 건설사에서 전기 배선 부분을 하청 받은 전문건설업체인 D 사도 팀장과 계약해 일감을 맡겼다. 팀장들은 각 노동자들에게 통장과 체크카드를 새로 만들도록 지시한다. D 사가 새 통장에 임금을 입금하면 그 통장을 관리하는 팀장은 거기서 자기 몫을 떼고 기존 통장으로 다시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전국플랜트건설노조 관계자는 “보통 팀장들이 노동자 명의의 통장을 보관하면서 회사에서 입금한 돈을 다 주는 게 아니다. 팀장이 자기 몫을 가져가고. 나머지를 노동자들에게 준다”라고 설명했다.
대포통장을 냈음에도 최 씨는 기존 통장으로 임금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다들 팀장이 갖고 있는 통장으로 들어갔는데 몇 사람은 바로 넣어줬다”며 “나처럼 항의를 하거나 좀 뻣뻣한 사람만 바로 입금시켜줬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최 씨 임금에서 자기 몫을 빼지 못하자 팀장은 최 씨의 일당을 9만 원이 아닌 8만 원으로 줄이고 나머지를 달라고 수차례 요구했다. 팀장의 요구를 거절한 최 씨는 결국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전국건설노동조합 관계자는 “팀장 제도는 불법이다. 원청에서 하청, 재하청으로 넘어가면서 이렇게 자기들이 다 떼먹는다. 가장 떼먹기 쉬운 게 인건비다”고 설명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근로기준법 43조 1항에 따라 임금은 현금으로 직접 근로자에게 그 전액을 지급하여야 한다. 그 조항 위반”이라고 보탰다.
황 아무개 씨(54)도 지난해 8월 최 씨와 함께 화력발전소에서 전기 배선 작업을 했다. 황 씨 역시 기자에게 직접 대포통장의 입출금내역을 보여주며 “팀장이 내 통장을 쥐고 관리하니까…. 중간에서 얼마나 해먹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했다. 황 씨 명의의 통장엔 D 사가 급여 200만여 원을 지급했는데 이를 전부 인출한 흔적이 있었다.
D 사 관계자는 “회사 입장에선 일 잘하는 사람들 모으기가 쉽지 않아 팀장과 계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임금을 그대로 팀장이 받아버리면 세금이 엄청나게 나오기 때문에 팀원들한테 골고루 나눠줬다가 가져가는 경우가 있다”며 “대포통장을 쓰는 게 아니다. 위임장 써서 하면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올해 초 금융감독원은 “통장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설사 돈을 주고받지 않았더라도 처벌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황 씨는 지난 3월부터 약 두 달 동안 다른 지방 화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도 J 사와 계약하고 전기 배선 작업을 했다. 물론 당시에도 팀장 김 아무개 씨가 대포통장을 요구해 황 씨는 통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황 씨는 팀장이 그 통장을 통해 현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관리한다고 믿었다. 황 씨가 앞서 보여준 통장의 출금내역에도 팀장 명의로 월급이 인출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황 씨의 4월 월급이 미지급됐다는 것. 그는 “임금체불에 대해 J 사에 항의했지만 현장소장한테 월급이 지급됐다고 했다. 누가 얼마를 먹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황 씨는 “팀장이 통장을 이용해 챙긴 돈을 현장소장한테 로비하고 소장은 원청업체나 본사부장에게 로비할 거다”라며 추가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황 씨를 관리했던 현장소장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임금을 본사에서 일괄 지급해야 하는데 황 씨가 연락도 안 됐다. 통장을 만든 부분은 전혀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팀장 김 씨는 “성과에 따라 지급하려면 어쩔 수 없다”며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으로 팀원들의 회식비 등을 내고 일이 끝나면 통장과 체크카드를 돌려준다. 로비 같은 것은 절대 없다”고 해명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