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심상정’은 없었다
▲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운동권 시절 후배 이름인 ‘김혜란’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왼쪽은 대학생 시절 심 의원. | ||
가명이 유명해져 그냥 이름처럼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노동의 새벽’으로 유명한 시인 박노해의 본명이 대표적. 그의 본명은 박기평이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란 의미로 박노해란 이름을 써 왔다고 한다.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다수의 현역 국회의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갖가지 사연을 담은 가명들은 십수년이 지난 지금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운동권’ 출신 17대 국회의원들의 갖가지 사연을 담은 가명들을 알아봤다.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을 해 왔던 열린우리당 최규성 의원은 “70년대까지는 상황이 괜찮았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시작된 이후에는 학생운동이건 사회운동이건 본명으로 활동할 수없는 상황이 됐다”라고 말했다. 자신을 감추고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최 의원의 설명. 가명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단다.
군사독재 시절 대부분의 ‘운동권’들은 두 개 이상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경찰에 잡힌 이후 국가보안법 등 시국관련 혐의 외에도 ‘문서 위조’가 범죄혐의에 추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 유기홍 의원, 이화영 의원, 선병렬 의원 | ||
1980년대 후반부터 <신동아>와 <사회평론>(90년대 초 폐간)에 민주화 관련 글을 게재했던 유청하는 사실 현 열린우리당 유기홍 의원의 필명이었다. 이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려지게 됐다.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등에서 활동했던 유 의원의 가명 유청하로 인해 벌어진 에피소드도 많았다고 한다. 그 중 유 의원이 소개한 웃지못할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90년대 초 내가 유청하라는 이름으로 ‘3·1운동’에 관한 논문을 써서 당시 민주화운동 잡지였던 <사회평론>에 기고한 일이 있다. 그런데 논문이 발표된 이후 원로학자인 서울대 신용하 교수가 내 논문의 일부내용을 ‘유청하에 따르면’이라고 인용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 교수는 유청하가 교수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한국사학계의 큰 어른인 신 교수가 인용하고 나니 유청하는 자연스레 학계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유청하를 찾아 나선 사람들도 많았다”
유 의원은 유청하외에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백상호라는 가명도 쓴 바 있었다. 1986년 수배를 당할 당시부터 썼다는 백상호에 대해 유 의원은 “선배들이 도망을 잘 다닌다는 의미로 백상어를 본따서 만들어 준 이름이다”고 회상했다.
유 의원은 그 외에도 백기현 등 몇 개의 가명을 더 가지고 있었다. 본명을 처음 쓴 건 90년대 초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을 하면서부터였다.
민주화 운동을 거쳐 <월간 말> 기자를 지낸 열린우리당 정봉주 의원의 민주화 운동 시절 가명은 정시진(鄭時眞)이었다. ‘참다운 세상은 꼭 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이 이름을 정 의원은 1985년부터 5년 이상 써 왔다. 지난 17대 총선직후 당선자 워크샵에서 정 의원은 80년대 같이 활동했고 지금은 열린우리당 당직자로 일하고 있는 후배를 10년여만에 만났을 때 정봉주가 아닌 정시진이란 이름을 대고서야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 정봉주 의원, 안영근 의원, 조정식 의원 | ||
열린우리당내 중도보수 그룹을 이끌고 있는 노동운동가 출신의 안영근 의원의 노동운동 당시 이름은 두경이었다. 성은 따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안 의원은 “비공개 노동운동을 하던 80년대 초반까지 이 이름으로 활동했다. 1983년부터 공개활동을 했으니 아마도 그때까지 이 이름을 쓴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안 의원의 의원회관 책상에는 16대 국회 때부터 줄곧 주물로 제작한 마르크스와 레닌의 흉상이 올려져 있다. 안 의원이 가장 아끼는 보물 1호. 안 의원은 “민주화 운동 시절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간직하고 있다”며 “마르크스와 레닌은 세계 최초로 혁명을 성공시켰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의지와 정신을 배우고 싶다”고 덧붙였다. 최근 안 의원은 ‘사람됨의 의미’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지난 연말 국보법 파동 당시 열린우리당내 국보법 폐지를 주장한 강경파의 행동대장격으로 활동하며 주목을 받았던 선병렬 의원은 대학 재학시절 문화식이라는 가명을 썼다고 한다. 대학 2학년때 스터디 그룹을 같이 하던 선배들이 ‘잘 웃고 분위기를 잘 이끈다’는 의미로 붙여준 이름이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두루 경험한 경력을 갖고 있는 열린우리당 조정식 의원은 80년대 노동운동 현장에서 ‘정씨’로 불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공장에 위장 취업할 당시 만들었던 가짜 주민등록증의 주인이 정씨였기 때문이었다. ‘정씨’는 이후 경찰의 눈을 피해 두 번째로 찾아 들어간 공장에서는 ‘강씨’로 바뀌었다. ‘정씨’때와 같은 이유였다.
조 의원의 대학시절 가명이자 별명은 ‘부다’였다고 한다. 대학 3학년때 한 비밀회의에서 양반다리로 졸고 있는 모습이 마치 부처같다며 선배들이 그렇게 부른 이후 대학생활 내내 별명이자 가명으로 쓴 이름이었다고 한다. 조 의원은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가짜 주민등록증은 전북에 사는 사람의 것이었는데 사실 미안한 일이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시대의 아픔이 있었지만...”이라며 멋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