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에 밀렸던 ‘종가’ 부활의 노래
왼쪽부터 최지성 실장, 장충기 사장.
흥미롭게도 삼성물산 초기에는 호암보다는 효성그룹 창업자인 조홍제 회장이 경영을 도맡아했다는 점이다. 조 회장은 1962년에 효성물산으로 독립한다. 삼성물산은 1975년 종합상사 1호로 지정되고, 1977년 통일건설을 인수해 건설업에 진출한다. 1978년 신원개발까지 인수해 삼성종합건설을 세운다. 이처럼 삼성물산은 그룹 초창기 사업 확장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삼성물산이 삼성전자를 비롯해 주요 계열사 지분을 다수 보유하게 된 것도 그룹 초창기 사업확장 때 출자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다.
삼성물산은 중동개발 붐과 부동산 열풍을 타고 급성장한다. 1995년 삼성물산은 삼성건설(삼성종합건설)과 합병, 1999년에는 의류사업은 제일모직에 매각하고, 유통사업은 삼성테스코로 떼어낸다.
그룹의 종가역할을 한 데다, 외형도 가장 컸던 덕분에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삼성물산은 삼성생명과 함께 그룹의 양대 축이었다. 삼성 내에서도 삼성물산 출신을 단연 최고로 쳤다. 삼성의 한 전직 임원은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그룹 공채를 뽑으면 삼성물산을 가장 선호했다. 삼성전자로 배정받으면 안 간다고 떼쓰는 직원이 있을 정도였다.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종합상사 사업모델이 위축되고, 전자부문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그룹의 간판 자리를 삼성전자에 넘겨주게 된다. 하지만 삼성물산 출신의 삼성맨들 다수가 전자로 이동, 오늘날 삼성전자 신화의 밑거름이 된다. 현재 삼성 미래전략실을 맡고 있는 최지성 실장, 장충기 사장 등이 모두 1970년대 중반 삼성물산 출신이다.
삼성물산의 그룹내 위상 변화는 최고경영자 면모에서도 나타난다. 삼성물산의 역대 대표이사를 보면 1938년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 이후 ‘사장’급이 맡아오다, 1978년에는 이건희 회장이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취임한다. 이후에도 삼성의 최고 핵심 인재들이 삼성물산의 경영을 책임졌다. 1995년부터 6년간은 전문경영인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부회장’이 경영을 맡았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위상이 약해지면서 ‘사장’으로 급이 떨어진다. 대신 2000년부터는 삼성전자에 부회장 대표이사 시대가 열린다.
최근까지 그룹 내 삼성전자의 비중이 더욱 커진 반면 삼성물산은 경영실적이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종가의 위상이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이번 제일모직과의 합병으로 삼성물산은 창업 초기 막강했던 위상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삼성전자의 최대주주사이지만 총수 지배력이 약해 위상을 높일 수 없었던 약점을 이번 합병으로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지만, 사실상 그룹 지주사와 마찬가지인 합병법인의 명칭은 삼성물산으로 정한 것도 종가의 위상을 살려 준 결과로 해석된다. 또 실제 사업부 규모를 봐도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을 압도한다. 이 때문에 결국 합병 후에도 실질적인 중심축은 기존 삼성물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