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노벨상 기회 제 발로 걷어찼다”
햇볕정책의 화두를 처음 던진 한완상 전 부총리는 본인의 제안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과감히 받아들였다면 한국 최초의 노벨평화상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몫일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한마디로 민족의 억울하고 부당한 고통의 70년이다. 이전에 식민지 36년의 고통을 따지고 보면 무려 106년에 걸친 고통의 역사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전범국 일본은 독일처럼 국제규범상 마땅한 정의의 심판에 의해 분단되거나 착취했던 영토를 원래 주인에 돌려줬어야 함에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분단은 그들에 의해 36년의 고통을 겪은 우리가 당했다. 또 분단 5년 만에 한국전쟁이 터져 300만 명의 동족이 죽었다. 휴전 이후 63년간 군사비, 사회·문화비용, 정치·법률비용 등 냉전비용도 엄청나다. 분단 70년은 전쟁의 고통으로 점철된 억울하고 비극적인 역사인 셈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는 <일요신문> 인터뷰 내내 이 억울함을 힘주어 말했다. 특히 그는 분단의 가장 큰 원인을 두고 ‘미국의 사려 깊지 못한 군사적 판단’을 꼽았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이후 참전한 소련이 국경선을 넘어 한반도로 내려오자 미군은 ‘서울과 인천은 가급적 우리 지휘에 두라’는 지침 하에 ‘분단선’을 고민했다. 당시 미군 본 스틸, 딘 러스크 대령은 상황실에 걸린 한반도 지도를 보고 38선에 선을 그었다.
한 전 부총리는 이를 두고 “만약 미군이 고려 이후 1000년간 독립 민족으로서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 아래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존중했더라도 우린 분단이 안 됐을 것”이라며 “당시 미군이 38선을 긋는 결정을 내리는 데 10초에서 30분이 걸렸다는 얘기가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미군이 내린 찰나의 판단으로 우리의 70년 안타까운 분단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초대 통일원 부총리를 시작으로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까지 직·간접적으로 세 정부에 참여했다.
“모두 비판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김영삼 정부의 통일정책과 대북정책은 허무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초기 6개월 동안 90% 이상에 달하는 국민 지지 받았다. 고위층 재산공개, 군대 사조직 척결, 안가 제거, 금융실명제까지 국내 개혁 면에선 큰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남북관계 악화가 민주주의를 훼손시킨다는 진리를 몰랐다. 참 이상하게도 남북에서 극단적 냉전 세력이 집권하게 되면,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가 어려워진다. 남북관계가 악화되면, 집권세력이 상대방을 악마화 시키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 흐름을 민주세력이 비판하면, 지배세력은 민주세력을 낙인찍어 억압한다. 그 작업이 친북, 종북 딱지 붙이기다.”
―색깔론을 말하는가.
“그렇다. 색깔론을 이용하면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인권은 위축되기 쉬우며, 평화는 더욱 멀어진다. YS는 이 진실을 몰랐다. 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민주개혁을 하면서도 남북관계 진전을 이룩하지 못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YS가 국내 개혁을 잘했기 때문에 난 너무 안타까웠다.”
한완상 전 부총리는 김영삼 정부 통일원 부총리 시절이었던 1993년 5월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햇볕정책’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는 당시 <햇님과 바람님>의 이솝우화를 인용하며 “전쟁은 절대 안 된다”는 전제하에 “김영삼 정부는 흡수통일을 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그것을 추진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그러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어쩌면 햇볕정책의 화두를 처음 던진 한 전 부총리의 제안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과감히 받아들였다면, 한국 최초의 노벨평화상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몫일 수도 있었다는 것. 1993년 5월, 한 전 부총리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남북 핵 통제 공동위원회 즉시 가동’, ‘남북미중 4자회담’,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경제적 이용’ 등의 내용을 담은 이른바 ‘김영삼 독트린(가칭 한반도 탈냉전 및 평화선언)’을 제안했다. 만약 ‘김영삼 독트린’이 선포되고 국제적으로 주목을 끌었다면, 여기에 대통령 취임사에서 천명한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노벨평화상을 받을 만한 지도력이 탄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건을 보고하는 동안 졸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본 한 전 부총리는 맥이 빠졌다는 후문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햇볕정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실현했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걷어찬 노벨상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몫이 됐다. 한 전 부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12월 노벨상을 수상할 때, 현장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만감이 교차했다.
―정작 햇볕정책은 김대중 정부 때 실현됐다.
2000년 6월 16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 대통령의 평양 출발에 앞서 포옹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 전 부총리는 비료회담이 무산된 직후였던 8월 북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로부터 초청장을 받게 된다. 8월 21일 중국을 통해 방북길에 오른 그는 북한에 들어가기 직전 베이징에서 뜻밖의 인물과 조우한다. 바로 비료회담 대표였던 전금철 책임참사였다. 전금철은 당시 북한 최고의 대남 전문가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전금철은 입에 거품을 물며 앞선 비료회담 실패에 대한 섭섭함을 표했으며, DJ의 대북정책에 대한 본심을 묻기도 했다. 그리곤 6시간 동안의 대화 끝에 “우리가 당신을 영접할 수 없다”며 “이유는 지금 말할 수 없다”고 갑작스레 한 전 부총리의 방북을 불허했다. 알고 보니, 그 해 8월 북한은 ‘대포동 1호’를 발사했고, 9월 초 헌법을 개정했으며,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됐다. 북한 내부가 갑작스레 분주했던 이유다.
지난 5월 30일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마당에서 분단 70년의 과거를 조명하는 ‘통일박람회 2015’ 사진전이 열렸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천신만고 끝에 나오게 됐다. 6·15 공동선언은 남북관계 개선의 총체적 청사진이었다. 특히 북한의 느슨한 연방제와 남한의 국가연합이 공통점이 있음을 명시한 2항은 남북이 함께 통일 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끔 근거를 마련했다. 하지만 DJ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실무적 협의로 이어가진 못했다. 각론적, 실용적, 구체적 협의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임기가 끝날 즈음 미국에선 클린턴 정부가 물러나고, 미 역사상 가장 보수에다 호전적인 부시 정부가 들어서며 남북관계는 더욱 꼬여버렸다.”
―퍼주기 등 햇볕정책에 대한 논란이 여전한데.
“하나만 묻고 싶다. 햇볕정책을 비판하든 찬성하든 이것 외에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이 있는가. 햇볕정책은 가장 현실 합리적인 안이다. 현실적인 관찰에서 답이 있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로 국제사회가 북한을 옥죄고 제재를 가한 기간 동안 북한은 뭘 했나. 미사일 개발하고 핵개발을 가열차게 했다. 북한은 오히려 그 기간 동안 중거리 미사일 개발, 핵탄두 소형화까지 상당한 진전을 이룬 것 같다. 지난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은 국제사회에서도 묵시적으로는 성공적이라고 인정하는 현실이다. 결국 ‘반 햇볕정책’으로 북한을 옥죄고 억누를수록 북한은 핵개발에 박차를 가해왔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에서 보면 햇볕정책 이외의 것을 쓰면 역효과가 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는 국제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 들어 10·4 공동선언이 나왔는데.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환송오찬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기가 막힌 내용을 담았다. 특히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이행시키는 4항은 굉장히 평가받을 만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시간이 없었다. 아무 효력을 발생시킬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음 이명박 정부가 들어오자마자 이것을 철저하게 무효화하지 않았나. 꿈은 그렸지만 실현은 못한 셈이다. 그러니 노무현 정부도 남북관계 대선에 있어서 시원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1993년 북한 NPT 탈퇴 결정적 이유 최초 공개 “딕 체니<당시 미국 국방장관>가 1년 만에 팀 스피릿 재개” 한완상 전 부총리는 이번 <일요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1993년 북한이 NPT를 탈퇴하게 된 배경과 관련한 일화를 처음 공개했다. 그 일화는 1992년 그가 김영삼 대통령 후보 캠프에 있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 일요신문 DB 그런데 미국은 한국의 대통령선거가 막바지로 달려가던 가을 즈음, 합동훈련 중단 1년 만인 1993년 팀 스피릿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한 전 부총리에 따르면, 훈련 중단에 힘썼던 그레그 대사는 굉장히 화가 났다고 한다. 본인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일을 단 1년 만에 되돌려 놓았으니 말이다. 한 전 부총리는 당시 심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때만 해도 이듬해에 내가 통일원 부총리를 맡게 될 줄은 몰랐다. 다만 속으로 ‘야…, 이거 팀 스피릿 재개되면 남북관계가 어려워지겠는데’라고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통일원 부총리가 됐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내게 온 셈이다. 문제는 북한이 팀 스피릿 재개 결정을 듣고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북한이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NPT를 탈퇴한 이유가 바로 이 팀 스피릿 재개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다. 어떻게 보면 참, 김영삼 정부는 운명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 출범했다.” 당시 1년 만에 합동훈련이 재개된 구체적인 배경은 최근에서야 풀렸다. 지난 2013년, 방한한 그레그 전 대사와 한 전 부총리의 좌담 과정에서다. “좌담에서 만난 그레그 전 대사에게 ‘당시 누가 팀 스피릿을 재개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레그 전 대사는 내게 귓속말로 ‘그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딕 체니가 한 것’이라고 처음 얘기하더라.” 한 전 장관이 그레그 전 대사를 통해 북한의 NPT 탈퇴의 장본인으로 지목한 딕 체니는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정치인으로 꼽히는 딕 체니는 부시 정부의 이라크 공격 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고 회자된다. 한 전 장관은 그에 대해 “한마디로 고약한 사람”이란 표현을 썼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