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던 차에 정통으로 뺨 맞았다
▲ 지난해 7월21일 제주에서 한일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이 열리는 동안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사태가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악화된 배경에는 무엇보다 그 동안의 ‘조용한 해결’에서 ‘대일 신독트린’을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강경 대응을 선언한 노무현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특히 노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자제하고 있지만 시마네현 조례 제정을 보며 매우 화가 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과거사 언급 자제’로 일본에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지만 ‘소 귀에 경 읽기’였다고 판단, 강경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여기에 일부에서는 2년 동안 계속 지지율 침체를 겪고 있는 참여정부가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독도문제에 ‘올인’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에서는 노 대통령의 독도 강경 대응이 4·30 재보궐 선거를 위한 현실적 선택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정부의 대일 강경 대응 그 이면을 따라가 봤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2월10일 취임식을 앞두고 당선자 신분으로 일본 여야 지도부를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과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때 노 대통령은 대일 외교 방침을 처음 밝혔고 이것은 DJ정권 이래 견지돼온 대일 화해 정책을 계승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 뒤 노 대통령의 ‘일본 사랑’은 지난해 12월까지 변함 없이 유지되는 듯 싶었다. 특히 그는 지난해 7월 제주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제 임기동안에는 한국 정부가 한일 간 과거사 문제를 공식적인 의제나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으려 한다”고까지 말해 외교 전략의 다양성을 스스로 막았다는 비판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과 주한 일본 대사 타카노의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발언 등이 노 대통령을 자극했다. 그 결과 노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배상문제’까지 거론하며 한일관계 기조의 전환을 시사하는 강한 톤의 연설을 했다.
하지만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자세를 보이기는커녕 몇 시간만에 내놓은 논평에서 “국내용일 것”이라며 노 대통령의 ‘진정성’을 깎아 내리려는 태도를 보였다. 여기에 후쇼샤 역사교과서 개정판도 4년 전보다 더 개악된 것으로 전해지자 노 대통령이 매우 격노했다는 것이다.
▲ 독도 전경. 국회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의 격노를 보면서 10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버르장머리 발언’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95년 11월14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자리에서 “(일본측의 거듭되는 과거사 망언과 관련해) 이번에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쳐 놓겠다”고 해 국제 외교가를 발칵 뒤집어 놓은 바 있다.
당시 국민들은 김 전 대통령의 ‘일갈’에 대해 “속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2년 뒤 ‘버르장머리 발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이 97년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일본 은행들이 김 전 대통령의 강경 발언을 이유로 태국 발 외환위기가 북상할 때 한국의 은행에 빌려준 자금에 대해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아 한국이 외환위기에 빠졌다는 분석도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최근 독도와 교과서 개정 문제와 관련해 “정신적 침략을 당했다”는 초 강경 발언을 한 바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버르장머리 발언’에는 못 미치지만 노 대통령의 대일 역사 인식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켰다는 점에서 신중치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교의 첫째 원칙인 ‘모호성’을 상실해 향후 대일 외교 카드에서 융통성을 살려나갈 수 없게 됐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정치평론가 A씨는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독도 문제로 한껏 기분을 냈지만 실익은 별로 없다. 이것이 한국 대일 외교의 현 주소다. 북핵 문제는 한일 양국의 긴밀한 공조가 필수적이다. 또한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 경제 현안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문화 교류도 한류의 분위기가 위축될 수 있다. 국민의 대일 감정이 악화된 배경에 노 대통령의 신중치 못한 상황 판단이 그 이유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견도 있다.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 교수는 “노 대통령이 강경 대응을 하는 것은 그것이 영토문제이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도 과거사 문제나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왔다. 또한 이번 사태는 일본이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강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원칙은 견지해나가야 하겠지만 국제정세가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따라가야 한다. 너무 원칙에 얽매이다 보면 퇴로가 없게 된다.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이번 독도 사태 과정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노 대통령의 지지율이 올라간 자료도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독도 사태로 대일 감정이 악화되던 지난 3월17일 발표된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지난해 6월5일 재보선 패배 이후 최고치인 37%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잘못하고 있다’는 의견이 49%로 높긴 하지만 노 정권으로서는 지지율 반등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일본 언론은 이에 대해 한국 정부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노 정권이 이번 독트린으로 일본에 강경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국내 정책기반을 정비, 반일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정권의 구심력 향상을 기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요미우리신문>도 “한국의 역대 정권은 낮은 지지율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일본에 대한 과거사 카드를 이용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노 정권도 이 카드를 전면으로 내민 격”이라고 주장했다.
▲ 지난 16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다케시마의 날’ 등 관련 반일 시위.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런데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여론조사 중 향후 대 일본관계와 관련해 “과거에 매달리기보다는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32.7%)는 의견보다 “올바른 관계정립을 위해서도 과거청산이 우선이다”(65.0%)는 의견이 두 배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이런 조사 결과에 대해 “이번 일본 파동이 정치권의 쟁점인 과거사법 처리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 정권으로서도 대일 강경 대응이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판단, 과거사 처리 문제도 명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처해나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반일 쓰나미’는 결국 과거사 문제에 자유롭지 못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야당을 압박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노 대통령의 대일 강공 기조가 다가오는 4·30 재보궐 선거를 위한 여론 조성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치평론가 B씨는 이에 대해 “현재로선 그 결과를 알 수 없지만 반일 감정이 재보궐 선거까지 그대로 이어질 경우 여권의 프리미엄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하면서 “노 대통령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민심이 정부의 강경책에 힘을 실어 주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라면 재보궐 선거에서도 여권이 선전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중의원 보좌관을 지낸 뒤 현재는 국내에 유학중인 일본인 N씨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N씨는 먼저 “최근 들어 일본 자민당 의원들이 전화를 해와 ‘왜 시마네현이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올해가 한일 우정의 해인데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다”고 일본의 분위기를 전한 뒤 “대체로 일본 정치권은 노 대통령이 독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4월 재보궐 선거에도 독도 사태가 유리하게 작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독도 문제가 국내문제와 연결될 경우 올바른 외교적 해결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 교수는 이에 대해 “국내정치 요소에 의해 두 나라의 독도 문제 대응 방향이 정해지면 민족주의의 대립 등 큰 부작용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도 여권이 독도 문제를 재보궐 선거용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시각에 대해 부정적이다. 당 핵심 관계자는 “아무래도 그런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현 상황에서는 여론 때문에 독도 문제에서 한 발 뺄 수도 없는 처지다. 여권이 재보궐 선거를 이긴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연결지을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무성 사무총장이 최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독도 문제 전면 대응과 관련해 “정 장관은 대통령 선거운동을 중단하기를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쏘아붙인 것을 두고 보면 독도 문제가 언제든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