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싸워도 이기는 나는야 ‘소송의 황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 입장을 밝혀온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지난 9일 이번 합병을 저지하기 위한 법적 절차에 착수했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삼성물산 서초사옥 모습. 연합뉴스
# ‘소액주주’에 이익 돌려줘
엘리엇펀드는 소액주주 권리보장을 명분으로 내세워 주주연대를 구성하고, 그 힘으로 회사와 협상해 주주보상을 이끌어내는 전략을 펼쳐왔다. 이번 삼성과의 대결에서도 엘리엇펀드는 “삼성물산의 합병비율이 낮게 정해져 소액주주들에게 불리하다”고 주장, 상당한 소액주주 지지를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엇펀드는 차입을 통해 투자규모를 늘리기보다는 다른 주주와의 연대를 통해 회사를 압박하는 압력을 높이는 전략에 능하다. 그리고 이 같은 연대는 엘리엇펀드는 물론 같은 편에 선 소액주주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003년 엘리엇펀드는 P&G가 인수합병(M&A)을 추진하면서 우선주 주주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지 않자, 6년간의 소송과 협상 끝에 보상수준을 높였다. 2005년 미국의 소매업체인 샵코(Shopko)는 한 사모펀드로부터 주당 24달러에 주식을 매각하라는 제안을 받는다. 엘리엇펀드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다른 주주들과 연대해 협상한 끝에 매각가격을 주당 29달러로 높인다. 2006년 인력파견 회사인 아데코(adecco)는 독일 DIS 주식을 주당 54.5유로에 인수하려 한다. 엘리엇펀드를 비롯해 DIS의 주주였던 다수의 헤지펀드는 이에 반대하며 연대, 결국 주당 113유로에 주식을 매각한다.
# 소송전 적극적으로 활용
엘리엇펀드의 가장 큰 특징은 소송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이 경우 승률도 아주 높다는 점이다. 영국 <가디언>이 엘리엇펀드의 전형적인 투자방법을 “부실채권을 싸게 사서 팔든지, 아니면 소송을 통해 채권 원리금을 모조리 다 받아내는 게 주요한 투자전략”이라고 소개할 정도다. 창업자 폴 엘리엇 싱어(Paul Eliiot Singer) 회장 본인도 하버드 로스쿨 출신 변호사다.
DIS의 사례에서도 경영진을 압박하는 데 소송이 큰 역할을 했다. P&G의 사례에서도 주주들에 보상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소송을 통해 입증했다. 특히 엘리엇의 소송능력은 국가와 상대해도 이길 정도로 탁월하다. 엘리엇펀드는 베트남, 아르헨티나, 콩고 등 경제위기에 처한 국가들의 채권을 액면가보다 훨씬 싼 값에 산 후 소송을 통해 채권액면가를 모조리 돌려받았다.
이번 삼성과의 대결에서도 삼성물산 주주총회 금지 가처분 신청, 삼성물산 자사주 매각 철회 가처분 신청 등으로 잇단 소송을 예고하고 있다. 증시의 한 관계자는 “합병 주총이 강행되고, 삼성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엘리엇펀드는 삼성 경영진에 대한 배임 소송 등으로 계속 삼성을 압박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왼쪽부터 폴 엘리엇 싱어 엘리엇매니지먼트 사장(로이터/뉴시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한 번 물면 승부 볼 때까지
엘리엇펀드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끈질김’이다. 한 번 먹잇감을 물면 끝까지 놓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정부와의 소송도 13년이 걸린 장기전이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짧은 기간 수익을 극대화하고 떠나는 방법이 아니라 목표한 성과를 낼 때까지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차입이 없는 데다, 새로운 투자자를 받지 않고도 펀드 규모를 키울 수 있을 정도로 기존 투자자들의 신뢰가 강해 시간에 쫓기지 않기 때문이다.
사례를 보자. 2012년 후반, 엘리엇펀드는 오일회사인 헤스(Hess)의 주주가 된다. 2013년에는 경영진들에게 일부 자산 매각을 요구하고, 5명의 이사후보를 추천한다. 이후 헤스는 엘리엇펀드의 충고에 따라 경영방침을 정하게 되고, 현재 엘리엇펀드는 헤스 지분 1780만 주를 소유한 대주주다. 엘리엇펀드가 가진 단일 기업 주식으로는 가장 큰 규모이며, 시가로는 13억 달러에 달한다.
이번 삼성과의 대결도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주주총회에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을 좌초시키지 못하면 당장 이번 합병과 관련해 법적으로 삼성을 압박할 카드는 많지 않다. 하지만 합병이 이뤄져도 엘리엇펀드가 가진 삼성물산 지분 7.12%는 제일모직 지분 약 4.7%로 바뀌게 된다. 삼성그룹 지주사인 제일모직의 주요주주로서 삼성을 계속 괴롭힐 수(?) 있는 셈이다.
증권가의 한 관계자는 “엘리엇펀드가 애초부터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만 보고 들어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 합병이 삼성의 후계구도와 관련이 깊고, 결국 삼성전자라는 ‘보물섬의 열쇠’가 될 수 있는 만큼 지속적으로 압박해 원하는 수준 이상의 수익을 얻어내려 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 ‘영향력’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엘리엇펀드 창업자 폴 엘리엇 싱어는 2004년부터 미국 공화당의 거액 기부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제는 선거를 앞둔 공화당 정치인들이 반드시 그를 거쳐야 할 정도다. 마음에 드는 정치인들에게는 앉은 자리에서 100만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줄 정도로 통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공화당 주변에서 그는 “폴 싱어 회장만큼 돈을 쓸 수 있다면,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로 유명하다.
아르헨티나와의 소송 당시 오바마 행정부와 미국의 대형은행들은 소송결과가 다른 경제위기 국가와 글로벌 채권시장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다. 하지만 폴 싱어는 공화당내 인맥을 동원했고 결국 아르헨티나를 압박할 수 있는 법안을 관철시켰다는 게 미국 정계의 후문이다. 엘리엇펀드가 다른 외국인 기관투자자들을 설득하고 포섭하는 데도 이 같은 영향력은 유용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폴 싱어는 부시 대통령 시절 이스라엘 특사로 임명될 정도로 유대계 사회와 인연이 끈끈하다.
자산운용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물산의 외국인 지분은 엘리엇펀드를 합해도 33%지만, 삼성전자의 경우 지분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폴 싱어 회장과 인연이 있는 기 관들일 가능성이 크다. 당장 삼성전자 경영권을 어쩌지는 못하더라도 주주들을 부추겨 지속적으로 경영진을 압박할 정도의 영향력을 충분히 가졌다고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 폴 엘리엇 싱어의 또 다른 면, 동성결혼 지지자
폴 싱어 회장은 사회활동과 자선사업가로도 유명한 엘리엇의 주요 기부처는 크게 3종류다. 공화당과 군 관련 보수단체, 사회봉사를 위한 자선단체 그리고 동성애옹호 단체다. 그가 동성애를 지원하는 이유는 현재 영국법인을 이끌고 있는 그의 아들이 동성애자인 데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동성애 지지활동은 상당히 열정적이다. 그는 “동성결혼이 가정의 안정을 증진시키며, 결혼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한 미국 사회에서 정말 필요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강조할 정도다.
폴 싱어 회장이 동성결혼과 관련해 관련 단체 및 정치권 로비에 기부한 돈은 외부에 알려진 것만으로 1250만 달러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재산만 2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폴 싱어 회장이지만 수익이나 평판에 당장 도움이 되기 어려운 주제에 쓴 돈이란 점에서 상당한 액수라는 평가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