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 등에 업고 ‘절대 반지’ 사수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이 신용정보집중기관 주도권 싸움에서 승기를 잡아 향후 거침없는 행보가 예상된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 6월 17일 국회에서는 정무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정무위는 신용정보집중기관 설립방안을 안건으로 올려 이 조직을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지를 논의했다. 신용정보집중기관은 은행과 증권, 보험, 신용카드 등 업권별로 흩어져있는 고객의 신용정보를 한데 모아 관리하는 조직이다.
쟁점은 이 조직을 은행연합회와 분리된 별도의 기구로 만들지 여부였다. 이미 은행권 고객들의 신용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은행연합회는 “이미 관련 업무를 하고 있는 은행연합회 내부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신용카드업계를 대표하는 여신금융협회와 보험업계 대표인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등은 “특정업권에 금융소비자 정보가 집중되면 오남용소지가 크다”며 별도 기구 설립을 주장했다.
각 업권마다 금융소비자 편익과 금융소비자 보호 등 ‘소비자’를 내세웠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은행연합회의 경우 만약 별도기구가 설립되면 조직이 반토막 날 위험에 처한 상황이었다. 은행연합회 조직과 업무의 60%가량이 금융정보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별도 조직이 만들어져 이 부문을 떼어줄 경우 사실상 빈껍데기만 남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씨티은행장에서 은행연합회 수장으로 변신한 하영구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정보집중기관의 은행연합회 내부 설치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다른 금융업권도 사활을 걸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소비자들의 금융활동이 은행계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탓에 은행업권에 끌려다니는 입장인데, 다른 신용정보까지 내어줄 경우 자칫 은행의 하부업종 정도로 취급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예컨대 보험사들의 경우 고객의 질병정보를, 카드사들은 거래 내역 등을 은행연합회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에 정보공룡이 탄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금융권은 이렇게 ‘은행 vs 비은행’ 구도로 나뉘어 신용정보집중기관 설립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마당발로 소문난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의 인맥에 다른 업종이 무릎을 꿇는 모양새가 됐다. 지난 17일 정무위 전체 회의에서 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독립기구화 불가”를 주장하며 임종룡 금융위원장으로부터 별도 조직을 신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정무위원장인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은 “법안을 통과할 때 은행연합회 중심으로 구성·운영한다는 부대의견을 달았을 때는 별도의 기관은 설치하지 않는 것으로 여야간 얘기를 했다”면서 “이 부대의견을 감안할 것인가”라고 임 위원장에게 질문했다. 이에 대해 임 위원장은 “정무위 부대의견에 대한 취지를 고려해서 일을 처리하겠다”고 답변했다. 이어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식 의원도 “국회가 채택한 부대의견의 취지는 신용정보집중기관을 (별도조직으로) 신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며 “금융위의 의견을 들어 달라”고 촉구했다. 임 위원장은 이 역시 “종합신용정보집중기관은 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구성 및 운영한다는 국회 정무위원회의 의견과 취지를 감안하겠다”고 답했다.
은행연합회 건물.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결국 국회가 개입하면서 신용정보집중기관의 독립기구화는 불가능해졌고, 하영구 회장과 은행연합회는 위기를 넘기게 됐다. 금융권은 이번 정무위 의원들의 개입이 하영구 회장의 막강한 정관계인맥과 무관하지 않은 결과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금융사 고위 관계자는 “로비력 싸움에서 하영구 회장과 다른 협회장들은 속된 말로 게임이 안 된다”면서 “공이 국회로 넘어간 순간 이미 끝난 싸움”이라고 평가했다.
14년간 씨티은행장 자리만 5연속 연임한 하 회장은 국내 관계와 정계, 금융계는 물론 글로벌 네트워크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로 꼽힌다. 경기고-서울대를 나온 KS 학맥은 기본이다. 또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조윤선 전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 등과의 끈끈한 친분을 바탕으로 ‘민간 낙하산’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은행연합회장 자리를 꿰찼다.
글로벌 인맥 또한 탄탄한 하 회장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막후 협상을 담당했을 정도로 국제 금융계에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인맥을 바탕으로 신용정보집중기관 주도권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하 회장은 향후 더욱 거침없는 행보를 보일 전망이다. 다른 금융업권의 고객정보까지 모두 은행연합회에 모이게 되면 결국 하영구 회장이 금융권의 ‘왕’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은행연합회로 고객정보가 집중되면 보험, 카드, 증권 등이 하영구 회장의 발아래 놓인다고 보면 된다”면서 “최소한 민간부문의 금융권력은 하 회장이 제패하게 되는 셈”이라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
신용정보집중기관이 뭐기에 개별 금융협회 보유정보 ‘한 곳으로’ 신용정보집중기관은 은행연합회, 여신금융협회,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등 각 금융협회의 신용정보를 한 곳에서 관리하는 조직으로, 내년 3월까지 최종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개별 금융협회가 보유한 고객정보는 각각의 금융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원이다. 예컨대 보험사의 경우 협회로부터 고객의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면 엄청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암에 걸린 환자인지, 수십 개의 보험에 가입하고 보험사기를 노리는 사람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금융권에 미치는 파워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은행계열이 아닌 카드사의 경우 은행 결제계좌가 있어야 신용카드 발급이 가능한데, 은행연합회가 계좌정보 제공을 거부하면 최악의 경우 문을 닫아야할지도 모른다. 고객정보를 가진 자가 금융패권을 손에 쥐는 구조인 셈. 은행연합회는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 하고, 다른 금융권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다. [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