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 체제 허물어야 우리가 산다’
여권 핵심부는 국면 전환의 한 방안으로 ‘김무성-유승민 투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지도부를 꾸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이 6월 25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를 하는 모습.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질책하는 등 강한 불만을 쏟아냈다. 일요신문 DB
“일단 판을 흔드는 데는 성공한 것 아니냐.”
친박계 중진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무리수를 둔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지적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그는 “유승민 원내대표가 고분고분 물러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그만두라고 그만둘 사람이냐. 지금의 상황은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헤게모니 싸움이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 원내대표의 용퇴 문제는 향후 전개될 권력 재편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설명이었다.
박 대통령과 유 원내대표 충돌을 지켜본 정치 전문가들은 친박이 완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은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박 대통령이 우회적이긴 했지만 유 원내대표를 불신임했다. 그런데 유 원내대표는 버텼다. 이에 친박 의원들이 의원총회를 통해 사퇴를 밀어붙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겉으로만 보면 친박이 구상했던 계획은 모두 어긋났다”고 말했다. 앞서의 친박계 중진 의원 역시 “솔직히 친박 힘이 모자라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박 대통령이 뒤에 버티고 있긴 하지만 그동안 세가 너무 약해졌다”고 하소연했다.
역설적으로 박 대통령이 사상 초유의 집권당 원내대표 공격에 나선 것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된다. 비박계가 주도하고 있는 당의 독자적 행보를 더 이상 묵과할 경우 향후 국정 운영이 힘들 것이란 판단을 했다는 얘기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박 대통령 지지율이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당이 박 대통령 간판을 달고 총선을 치르고 싶겠느냐.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청와대와) 거리를 두려할 것”이라면서 “박 대통령 지시를 당이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임기 후반기를 맞는 박 대통령 심정이 절박한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일각에선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가 이끄는 비박계가 이른바 ‘친박 학살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는 말이 돌자 박 대통령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얼마 전부터 여의도 주변에선 내년 총선 공천에서 탈락할 새누리당 의원들 실명이 거론된 바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부분 친박계였다. 몇몇 친박 의원들이 ‘살생부’가 존재하는 것 아니냐며 수소문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사실 여부를 떠나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에 대한 친박계의 불신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에 여권 핵심부는 국면 전환을 위해 여러 방안을 구상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가 ‘K-Y 투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지도부를 꾸리는 것이라고 한다. 친박계가 미는 새로운 원내대표를 선출한 뒤 조기 전대를 통해 당 대표까지 교체하는 시나리오를 그렸던 것이다. 박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의 원로 인사는 “박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이 청와대로 넘어오는 것을 보고 지금의 당으로는 국정을 끌고 나가기 힘들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안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했던 발언은 유 원내대표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 당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의미였고, 친박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라고 선언한 것이었다”면서 “나를 비롯한 몇몇 측근들이 모여서 향후 대응책을 긴밀하게 논의했고, 우선은 유 원내대표 사퇴부터 관철시켜야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전했다.
최경환 부총리(왼쪽)와 이주영 의원. 일요신문 DB
여권 핵심부는 유 원내대표가 사퇴할 경우 그 후임으로 이주영 의원을 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의원이 경선에서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만약에 진다면 박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회복이 힘든 상황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친박계가 추대 형식을 밀어붙일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비박계의 한 재선 의원은 “지금 당 상황을 감안하면 친박계가 미는 후보가 이기긴 어렵다. 지난해 전당대회와 올해 원내대표 경선 모두 비박이 승리하지 않았느냐”면서 “박 대통령과 친박계가 차기 원내대표를 경선이 아닌 추대를 통해 임명할 것이란 소문이 있는데 의원들이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설령 유 원내대표가 물러나더라도 차기 원내대표 경선방식을 놓고 계파 간 갈등이 벌어질 것으로 점칠 수 있는 대목이다.
원내대표 교체는 시작에 불과하다. 여권 핵심부는 김무성 대표 사퇴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새누리당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 조기 전대설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선출직인 김태호·서청원·이인제 최고위원이 동시에 물러나 전당대회를 다시 개최하자는 것이다. 특히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8월경 국회로 돌아올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게 나오면서 이는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박 대통령 ‘복심’으로 꼽히는 최 부총리가 전당대회에 출마, 친박계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정계개편을 주도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이다. 요약컨대, 여권 핵심부는 ‘최경환-이주영 체제’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최 부총리는 박 대통령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인사이기도 하지만 TK 출신이라는 장점도 있다. 박 대통령 정치적 고향인 TK 민심이 심상치 않다. TK의 차기 맹주 중 한 명이었던 유 원내대표를 공격한 것 때문이다. 역시 TK인 최 부총리를 통해 민심을 다독일 수 있다”면서 “최 부총리 개인으로서도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유 원내대표가 물러나고 본인이 당 대표까지 된다면 명실상부 지역 맹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여권 핵심부 구상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앞서의 비박계 재선 의원은 “백번 양보해서 전대가 열린다고 치자. 최경환 부총리가 될 수 있다고 보느냐. 절대 안 된다. 오히려 박 대통령은 데미지만 입을 뿐이다. 더 이상 당을 통제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할 것이다. 일부 친박 의원들이 박 대통령 탈당 운운하면서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하고 있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앞서의 박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의 원로 인사는 “머릿수 대결로 가면 안 된다는 것 잘 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박 대통령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유 원내대표를 공개적으로 질책했겠느냐”고 되물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