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넘나들며 위조지폐 찍고 뿌리고”
“1952년 7월 입대해 57년까지 군 생활을 했다. 공군 제90특무부대로 입대해 이후 공군 제20특무부대 특수첩보공작대(후에 6006부대로 개편)에서 공작과장을 역임했다. 6·25 한국전쟁 당시 도널드 니콜스 명에 따라 평양으로 침투해 공작 작전을 벌였고 각종 첩보활동 실무를 맡았다.”
―니콜스와 어떻게 연을 맺은 건가.
“광복 이후 평양에 있었던 나는 지하에서 반공 운동을 계속 해나갔다. 1946년 3·1절을 기해 반공지하조직 ‘조양단’을 조직, 김일성 암살거사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이후 반공투쟁이 문제가 돼 북한 흥남특별노무자 수용소에 수감돼 3년여간 중노동을 했다. 그러다 6·25가 터지고 1950년 10월 15일 국군이 흥남까지 북진했을 때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탈출 이후에도 지하 생활을 계속하다 1·4 후퇴 때 기회를 놓쳐 남하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평양에 남은 동지들, 국군 포로들과 ‘대한통일촉진회’를 조직해 지하 생활을 하면서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하던 중 공군특무대의 대북첩보공작으로 북파된 남한 공작원 석기봉 씨와 접선되어 북한을 탈출, 동지 6명과 함께 남한으로 건너오게 됐다. 니콜스(당시 공군 제90특무대 고문관)는 그렇게 서울 종로구 공군특무대 본부에서 만났다.”
―북한 정보가 많아서 니콜스가 반가워했겠다.
“평양에서 지하 활동한 내용,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 만한 각종 정보들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네꼬(니콜스의 별명)에게 보고를 하기 싫어했다. 내가 직접 ‘양키와 무슨 일을 하느냐.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니콜스는 한국말을 알아듣고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우리를 길들여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바로 영창을 보내더라. 결국 서울 종로구 원남동에서 첩보학교에 들어가 6주간 정보교육을 받고 니콜스와 함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니콜스가 첫 번째로 부여한 대북 첩보 임무는 무엇인가.
“평양 아지트 및 정보 접수, 조직원들의 체계적인 기반구축을 위해 다시 북한으로 침투하라는 게 첫 번째 임무였다. 이제 막 그 지긋지긋한 곳을 탈출했는데 다시 들어가라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서해안 교동도에서 특공대를 조직, 훈련한 후 25명이 북한 연백군으로 침투했다. 1952년 9월 18일의 일이다. 이후 평양으로 건너가 그쪽 지하 조직과 연계해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공군이 갖고 있는 지도와 현지 루트를 대조하는 한편, 비행장 위치와 무기 투하 장소들을 확인했다. 검문을 받는 등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연백군을 통해 해안을 따라 10월 초에 북을 탈출했다. 막 창설된 특공대로서는 훌륭한 성과였다. 니콜스도 좋아했고, 미 공군 심문관 10여 명이 현지로 급파돼 일주일간 정보를 분석했다.”
―공작과장으로서 어떤 첩보 활동을 했는지 듣고 싶다.
“북한에 첩보 조직들을 일단 구축해 놓는 게 첫 번째였다. 당시는 특공대를 통해 구축을 어느 정도 해놓은 상태였다. 조직원들이 무전(모르스 부호)이나, 중국을 통해 정보를 우리 공군 측에 전달했다. 첩보의 핵심 지역은 서해안이다. 일단 섬들이 많고 첩보원 주둔이 용이했다. 교동도, 말도, 우도, 백령도, 연평도, 쑥섬 등 북으로 침투하는 첩보원들이 항상 주둔하고 훈련했던 장소다. 침투는 해안을 따라 이뤄지는데 모선을 타고 가다가 어느 정도 가서는 모터 소리가 들리니까 뗏목을 타고 은밀하게 침투한다. 그래서 흔히들 ‘배타는 공군’이라고 많이 그랬다. 이러한 작전들을 지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북에 침투해서는 어떤 활동을 했나.
“정보수집과 관련한 모든 활동을 다 한다. 유언비어, 선동뿐만 아니라 공군이 보유한 지도가 맞는지 현지 지형과 대조를 하기도 하고 비행장 위치를 파악한다. 위조지폐도 직접 만들어 뿌렸다. 대원들마다 암호 번호가 있다. 접선할 때마다 번호를 대야지 접선이 가능하다. 혹시나 임무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항상 독약을 소지한다. 첩보원들이다보니 서로 간 임무도 잘 모를뿐더러 명령도 1대 1로 내린다. 점조직 형태인 셈이다.”
북한 위조화폐.
―북한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얘기인가.
“공군 특무대 산하에 ‘특수계획과’라는 부서가 있다. 그곳에 나와 북에서 탈출한 요원 2명이 소속돼 있었다. 당시 요원 중 한 명은 북에서 지폐를 새긴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을 토대로 틀을 만든 후 좀 더 정밀하게 만들기 위해 일본에서 찍어서 공수해왔다. 그것을 비행기에 실어 전선을 넘어 각각 거점에 뿌리고 돌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1952년 말경이었는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뿌렸다. 북한 화폐개혁(북한은 전쟁 이후인 1959년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2차 화폐개혁을 단행했다)이 당시 위조지폐 때문이라는 얘기도 군내에 있었다. 위조지폐 작전도 니콜스가 지시한 것이다.”
―직접 본 니콜스는 어떤 느낌이었나.
“마치 씨름선수 같다. 150kg 거구에 키도 180cm가 훌쩍 넘는다. 집이 서울 오류동에 있는 공군본부 바로 옆이었는데 집을 둘러싸고 사람 키만 한 철조망을 쳐놨다. 집은 2층 구조인데 1층에는 사냥개 50마리를 풀어놓고 키웠다. 개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호위용으로도 썼던 것이다. 니콜스가 자제 안 시키면 거의 물려 죽을 수도 있을 정도다. 아마 자신의 신변을 지키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김일성이 니콜스를 죽이려고 수차례 암살단을 파견했기 때문이다. 성격은 어찌나 괴팍한지 부하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도 먹을 것이나 복지는 잘 해줬다. 기분파라 술도 잘 사주고 마음에 안 들면 괴팍해졌다. 만화책을 좋아해 집안 서고 한 줄에는 미국 만화책이 쭉 있었다.”
공군 첩보부대 공작과장 시절 전우들과 함께. 가운데가 김인호 씨.
―한국전쟁이 벌써 65주년을 맞았다. 첩보요원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소회는.
“공군 특무대 임무를 위해 북에 침투한 요원들이 내가 추산하기로 1만 5000명 정도 된다. 거기서 돌아오는 요원은 1000명에 1명이 어렵다. 거기서 정보를 전송하고 임무를 수행하다 죽는 셈이다. 한 마디로 거의 못 돌아온다고 보면 된다. 그때 죽은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밤에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평화는 결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전우들과 이를 지휘했던 니콜스를 오래도록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