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품에 안겨 ‘삼성’ 간판 고집
지난 6월 29일 삼성테크윈의 주주총회에서 김철교 현 대표이사 사장이 삼성그룹과 한화그룹의 ‘빅딜’에 따라 사명을 한화테크윈으로 바꾸는 의안을 통과시키려고 하자 주주들이 막아서고 있다. 연합뉴스
빅딜 발표 후 어느 정도의 반발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강하게 반대할 줄은 한화그룹도 미처 몰랐다는 후문이다. 한화의 기존 사명이 ‘한국화약’인 만큼 방위사업은 한화그룹의 모태사업이며, 임직원들에 대한 처우 수준도 삼성에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빅딜은 되도록 원만히 진행될 것이란 전망이 완전 뒤바뀌었다. 피인수기업 노조의 비난이 거세지자 한화그룹 내부에서도 “우리가 그들보다 못할 게 없다. 이런 굴욕까지 얻어가며 인수를 해야 하나”라는 비판론도 제기됐다.
삼성테크윈 직원들이 인수를 반대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사안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겠지만 핵심은 ‘삼성’을 떼어낸 뒤에 벌어질 효과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통상 피인수 기업 노조는 고용보장, 급여 현실화 또는 인상을 주장하기 마련인데, 삼성테크윈 노조는 “대주주가 한화로 변경된다고 해서 ‘삼성’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사측이 포기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색 다른 주장을 고집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 환경에서 ‘삼성’이라는 브랜드는 유·무형으로 엄청난 프리미엄을 제공한다. 시장조사업체 밀워드 브라운이 집계해 지난 5월 발표한 삼성의 브랜드가치는 24조 300억 원(216억 200만 달러)으로 세계 45위에 올랐다. 삼성이란 이름만 붙으면 얻을 수 있는 효과다.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삼성 브랜드에 대한 애정은 매우 크다. 그런데 방위산업 업체들도 ‘삼성’ 브랜드에 대한 집착도 이에 못지않다. 삼성그룹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방위산업 구조개편의 중심에는 ‘삼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방위산업은 무기를 사고파는 사업이기 때문에 1차적으로 정부와 정부 간 관계가 중요하다. 한국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터키 등에 다양한 무기를 수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해당 국가와의 밀접한 관계가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수출 성공률을 높이는 데에는 업체의 브랜드 인지도 또한 중요하다. 아쉽게도 방위산업 부문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는 전무하다. ‘코리아’라는 국가명으로 만회해 보려고 하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다. 따라서 방위산업 업체들은 해외에서 가장 많이 인식하고 있는 한국 브랜드인 ‘삼성’과 ‘현대’ 등과 어떻게든 인연을 맺고 싶어한다. 이러한 삼성을 하루아침에 떼어내야 한다니 당하는 사람들이 받는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즉,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는 1등 브랜드인 ‘삼성’을 떼어내면 2류로 전락할 것이라며 사명변경 반대를 주장한 것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삼성테크윈·삼성탈레스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한화그룹이 방위산업을 확실하게 주도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는 지금보다 더한 거센 반대를 극복해야 한다.
채권단의 KAI 매각 때마다 항상 참여했고, 조양호 회장은 물론 아들 조원태 한진칼 대표까지 나서서 인수 의지를 밝혀온 한진그룹에 대해 KAI는 여전히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지난 2012년 매각 절차가 진행됐을 당시 KAI는 대표이사를 비롯해 임원들이 대거 참석하는 기자간담회를 자처해 노골적으로 한진그룹의 인수에 대해 반대를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KAI의 한 임원은 기자들에게 “한진그룹 주력업체인 대한항공은 잦은 항공기 사고로 브랜드 명성에 먹칠을 했다. 그런 기업에게 우리를 맡길 수 없다. KAI는 삼성이 인수하기를 희망한다. KAI의 약점은 부족한 브랜드 파워다. 삼성 브랜드를 달면 해외 수주전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를 매각하면서 삼성은 방위산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내 희망은 사라졌지만 KAI의 ‘삼성 바라기’는 여전하다.
이런 가운데 KDB산업은행 등 KAI의 주요 주주들은 최근 KAI를 공동 매각키로 하고 공식 매각 공고를 내기 전 인수자를 물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채권단 차원에서 한화그룹과 한진그룹 등 잠재적 인수후보들과 접촉하며 조건을 조율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삼성으로부터 KAI 지분 10.0%를 인수한 한화그룹이 한진그룹에 비해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 다만 결과는 낙관할 수 없다. 김승연 회장이 KAI를 얻겠다면 3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수 금액 마련과 함께 삼성을 향하고 있던 KAI 임직원들의 마음을 어떻게 한화로 돌리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여기에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변수를 막아내야 한다. KAI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현대차와 2013년 KAI 인수전에 참여했던 현대중공업 등이 거론된다. 특히 현대차의 경우 항공사업을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직접 키운 사업이자, 1996년 현대그룹 회장 취임사에서 종합제철·금융과 함께 이를 신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장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정몽구 회장이 마음먹는다면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한화그룹의 방위산업 부문 독식을 막겠다는 견제의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KAI는 삼성이 안 될 경우 현대가 주인이 돼도 무방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승연 회장이 KAI를 얻겠다면 삼성 계열사 인수 때보다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조정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