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 경영인’ 이번엔 깊은 내상
동부그룹은 유동성 위기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제조업 계열사를 잃은 김준기 회장(왼쪽)이 상실감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신문 DB
1970년대 중동 건설 특수 바람을 타고 현지에 진출, 사세를 확장했다.
중동에서 마련한 넉넉한 실탄을 필두로 1980년대를 맞이한 김 회장은 금융과 화학, 운송 등의 부문으로 사업을 확대하는 한편 1982년 동진제강(구 일신제강, 현 동부제철)을 인수하며 제철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에도 동부그룹은 확장을 거듭해 1990년대에는 재계 20대그룹으로 올라섰고, 2000년대에는 1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90년대 말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하며 동부전자를 설립한 그는 2001년에는 아남반도체를 인수했다. 양사가 합병한 기업이 현재의 동부하이텍이다.
이로써 동부그룹은 재계에서는 처음으로 산업의 쌀인 ‘제철’과 IT의 쌀인 ‘반도체’를 양대축으로 하는 사업구조를 갖추었다. 이후에는 발광다이오드(LED)와 로봇 사업에도 손을 뻗었고 에너지사업에도 진출했다. 동부그룹 관계자는 “김 회장은 기존에 영위하던 사업도 꼼꼼히 챙기지만,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사업에 대한 추진력은 동부그룹 전 직원들 가운데에서도 최고였다”고 설명했다.
불과 1년 만에 동부그룹은 크게 변했다. 만성적인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해 그룹이 해체 위기에 몰리자 동부건설, 동부하이텍, 동부제철, 동부팜한농 등 알짜기업을 비롯해 동부LED, 동부로봇 등 미래를 위해 설립했던 기업에서 손을 뗐다. 이들 기업들은 새 주인을 찾기 위한 매각 절차를 진행 중이거나 진행할 예정이다.
단 하나라도 잡기 위해 김 회장 스스로 수차례에 걸쳐 사재를 출연했지만 허사였다. 현재 동부그룹은 화재와 생명, 증권, 자산운용 등을 축으로 한 금융 계열사 중심으로 개편됐으며 지주사 역할을 하는 (주)동부와 동부대우전자, 동부메탈 정도만 남아 있다.
제조업 계열사를 사실상 모두 잃은 것이 김 회장으로서는 뼈아프다. 그룹 수익의 상당 비중은 금융 계열사에서 창출됐으나 김 회장은 그래도 제조업 계열사에 대한 애정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그룹 다른 관계자는 “김 회장은 성공을 위해 도전했다는 말을 자주했다. 기업가는 도전하되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와 전기로 제철사업에 진출한 이유도 이러한 신념 때문이었다. 위기 상황 속에서도 ‘두 사업 모두 성공하려면 많은 돈과 10년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끝까지 할 것’이라는 말로 임직원들을 격려하며 사업을 이끌어왔다. 그랬던 사업을 ‘빼앗겼으니’ 김 회장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고 전했다.
최근 김 회장의 건강 이상설이 흘러나왔다. 우리 나이로 71세니 20대 청년처럼 건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룹 관계자는 “당연히 최고라고 볼 순 없지 않겠느냐. 하지만 염려할 수준은 아니고 여전히 그룹 정상화를 위해 뛰어 다닌다”고 강조했다.
다만, 동부그룹 제조업 계열사의 붕괴를 불러일으킨 채권단에 대한 반감은 수그러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동부그룹 내에서는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이 유독 동부그룹만 가혹하게 몰아붙인다며 억울해 하고 있다.
동부제철에서 퇴사한 한 고위 관계자는 “우리의 경쟁 상대는 포스코, 현대제철이 아니라 은행이었다. 다른 계열사도 마찬가지겠지만 대출 심사도 경쟁사에 비해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이상이 없는데도 소문만 듣고 상환을 독촉했다”면서 “동부하이텍과 동부제철 모두 채권단의 압력이 선행되면서 회사가 어려움에 빠지는 상황이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이 2015년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한 것은 신년사를 통해서였다. 신년사에서 김 회장은 “동부는 산업은행에 적극 협조하였으며 구조조정의 성공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1년이 경과한 지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구조조정 과정에서 패키지딜의 실패와 자산의 헐값매각, 억울하고도 가혹한 자율협약, 비금융 계열사들의 연이은 신용등급 추락, 무차별적인 채권회수 등 온갖 불합리한 상황들을 겪으며 동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지난 반세기 동안 땀 흘려 일군 소중한 성과들이 구조조정의 쓰나미에 휩쓸려 초토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동부제철은 채권단에 경영권이 넘어갔고, 동부건설과 동부LED는 법정관리로 가야 했으며, 동부특수강·동부발전 등은 매각되고, 동부익스프레스는 FI들에 헐값에 넘어가는 등 그룹의 철강·건설·물류 부문이 완전히 와해되었고, 많은 계열사들이 크고 작은 유동성 문제로 위기에 처해 있다. 정책금융기관인 산업은행 주도하의 사전적 구조조정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고,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유독 7월을 좋아했다고 한다. 2009년 7월 1일 동부제철이 충남 당진에 건설한 전기로 일관제철소가 가동을 시작한 날이었다. 1972년 미국 철강업체인 알코어를 견학하며 구상했던 철강사업의 결실을 맺었던 그 날이었다. 하지만 전기로 제철소는 가동을 중단했으며 언제 다시 쇳물을 만들어낼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46년 경영인생 중 하루하루 외줄타기 심정으로 살아온 김 회장은 위기 때마다 다시 일어서 ‘오뚝이 경영인’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이번 위기도 반드시 극복하고 재기하리라는 기대감이 적지 않다. 하지만 김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번에는 워낙 잃은 것이 많은 데다 연세도 있어 쉽지 않을 듯하다. 예전에 비해 기운도 없어 보인다”는 말로 김 회장의 근황을 전하며 신사업 개척은 당장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이 관계자는 “김 회장은 이익이 생기면 주머니에 챙기지 않고 새 사업에 투자했다. 이러니 아무리 회사를 키워도 그가 가진 돈은 별로 없었다. 이런 동부를 채권단은 끊임없이 괴롭혔다. 오죽 하면 김 회장이 채권단을 ‘기업가 정신을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라고 했겠는가”라며 “김 회장은 기업가가 되려고 했고 기업인이 존중받는 세상을 꿈꿨다. 그가 무너지면서 더 이상 기업가적 논리로 사업을 개척할 수 있는 기업인은 나타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며 안타까워 했다.
조정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