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그냥 때리세요, 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중견 건축사무소에 다니는 김 아무개 씨(29)는 요즘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현장에서 ‘소황제’로 군림하는 소장 때문이다. 팀의 막내인 김 씨에게 ‘개인 카드로 모든 비용을 처리하면 돈을 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입금은 차일피일 미뤄 1000만 원대 카드 값을 마이너스 통장으로 막게 만들었다. 추가로 시킨 업무에 “잔고가 없어서 시킨 일을 하지 못한다”고 얘기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나보고 어쩌라고”였다. 가족여행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정해둔 휴가는 급작스럽게 취소시켜 결국 가지 못했다. 김 씨는 “업계 문화가 수직적인 면이 있어 본사에 얘기해도 꿈쩍 않는다. 나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털어놨다.
‘힘희롱’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직장 내 왕따, 괴롭힘이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파와하라(power harrassment·권력을 이용한 괴롭힘의 일본식 표현)’라는 단어가 유행어로 떠올랐다. 일본에서 ‘파와하라’는 사회문제로 인식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직장 내 힘희롱에 대해 미온적인 분위기다. 성희롱은 ‘조심해야 할 것’으로 분명히 자리 잡았지만, 힘희롱은 다르다. 어디까지가 힘희롱인지를 두고 명확한 기준이 없고, 인사권을 가진 윗사람이 가해자이기 때문에 대놓고 반발하기도 어렵다.
괴롭히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면 차라리 낫다. 마땅한 이유 없이 폭언을 하고, 심지어 그게 힘희롱인지도 모르는 상사들이 있기에 더 문제다. 회사원 이 아무개 씨(30)는 “힘희롱을 상습적으로 일삼는 일부 직장 상사가 있다. 업무상 실수를 해 혼낸다면 차라리 이해하겠다. ‘버릇없다’ ‘말투가 거슬린다’는 등의 이유로 막말하는 상사는 정말 꼴불견”이라고 꼬집었다.
최근 일부 대기업들은 힘희롱을 ‘해사 행위’로 규정하고 관련 캠페인을 지속하고 있다. 일부 기업에서는 직장 후배들을 대상으로 지나친 힘희롱을 한 직원을 좌천시키거나 대기발령까지 내는 경우도 있었다. 삼성 역시 2013년부터 ‘폭언 규정집’을 만들어 배포하고 직원 간 힘희롱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일부 기업의 대응일 뿐 힘희롱 사례는 여전히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작은 규모의 회사는 힘희롱의 폐해가 더 심각하다. 인사권이 집중돼 있고, 힘희롱 피해를 당해도 인원이 적어 속내를 털어놓자니 불안하다. 홍보대행업체에 다니는 민 아무개 씨(여·28)는 업체 대표로부터 당하는 힘희롱에 회사 다니는 게 지옥 같다. 민 씨는 “팀에 나 혼자 여자다. 대표는 나만 보면 사무실을 청소를 하라고 시킨다. ‘이런 건 여자가 하는 거다’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다른 동기들과 똑같이 면접 보고 들어왔는데 이런 대우를 받으니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직장 상사의 성희롱 사실을 회사에 알렸다가 힘희롱으로 보복을 당한 사례도 있다. 홍 아무개 씨(여·30)는 지난 2012년 12월부터 같은 부서 상사로부터 “다리가 예쁘다”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었을 때가 좋더라” 등의 말을 자주 들었다. 퇴근 후에도 단둘이 회식을 하자고 해 처음 한두 번은 응했으나 요구가 계속되자 회사에 이 사실을 털어놨다. 해당 상사는 지방으로 좌천됐고, 홍 씨는 다른 부서로 배치됐다.
하지만 새 부서 상사는 첫 면담부터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등의 말을 하더니 빈 책상에 앉아있게 하거나 업무지시 대신 하루 종일 대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홍 씨는 인사고과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고 3년 간 승진도 할 수 없었다. 뒤늦게 새 상사가 전 부서 상사와 입사 동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홍 씨는 결국 지난 3월 회사를 떠났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힘희롱은 엄연한 인격모독인 만큼 관련 매뉴얼과 사내교육을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조직원의 사기와 단합을 떨어뜨려 회사에도 악영향을 끼치므로 경영진의 관심은 필수다. <나는 무적의 회사원이다>를 집필한 직장생활 연구소 손성곤 소장은 “기본적으로 일이나 큰태에 허점을 보이지 않아 힘희롱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게 현명하다. 또 힘희롱을 일삼는 상사에겐 동료들이 힘을 모아 한 번쯤 대응할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