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덮었는데 녹취록서 ‘삐죽’
▲ 지난 97년 10월 사퇴한 김선홍 기아 회장. 그는 99년 국회에서 “삼성 계열사가 5천억원을 거둬들이는 바람에 기아가 몰락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 ||
삼성에선 “삼성의 금융 계열사들의 자금 회수가 기아차의 부도를 촉발시켰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삼성생명이 기아차가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전에 1백억원을 추가 대출해 준 적도 있다며 기아차에 대한 여신을 회수해 기아차를 궁지에 빠트려 부도나게 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은 지난 99년 1월 국회에 나와 “삼성이 금융계열사 등을 통해 빌려줬던 5천억원대의 자금을 거둬들였고, 결국 기아가 파산에 봉착했다”고 증언했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도청 녹취록에 등장하는 기아차 관련 내용은 삼성의 기아차 인수와 관련해 삼성의 고위층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 들어 있다.
기아가 부도날 당시 공교롭게도 삼성은 기아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전부터 기아차의 앞날이 어둡다는 식의 연구보고서를 공개했다.
97년 3월 작성된 ‘신수종 사업 추진현황 및 향후 계획 보고서’를 통해 기아차가 독자회생이 어렵다며 “삼성그룹의 자동차 사업 조기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전략적 인수를 추진하고 기아차 인수 분위기 및 여론을 점차 조성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 그해 4월에 삼성자동차 산업분석실에서 만든 ‘자동차산업의 구조재편 필요성과 지원방안 보고서’에선 ‘기아자동차가 성장의 한계에 직면했다’며 자동차 업계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두 보고서는 97년 하반기 외부에 공개되면서 기아차의 부도가 내부사정 때문이 아니라 기아차의 경영권을 노리는 외부세력 때문이라는 ‘음모론’의 불쏘시개 노릇을 했다. 기아차는 97년 봄부터 자금 라인에 이상이 왔다는 소문에 시달리다 그해 7월 금융권으로부터 부도유예협약을 받아 고비를 넘기는 듯하다가 석 달 뒤인 10월 정부가 법정관리 방침을 밝히면서 김선홍 전 회장 등 옛 경영진이 물러나고 국제입찰에 부쳐졌다.
당시 경제부총리는 강경식씨. 이번 녹취록에도 그와 관련된 부분이 나온다. 녹취록에 따르면 97년 4월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과 이학수 삼성 구조본 부회장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홍)우리가 재경원하고 업무적으로 많이 관계가 됩니까?
이)특별히 관계는 없습니다.
홍)내 생각으로는 강 부총리에게 인사 좀 했으면 좋겠어요.
이)그럼요. 그쪽과 관계가 있든 없든간에 해야지요. 3개에서 5개 정도 주시지요. 그 양반은 내가 결정적으로 밀어 줬거든요.
여기서 ‘내가 결정적으로 밀어 줬거든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산 출신인 강 부총리는 80년대 초 장관직을 그만두고 정계에 뜻을 두면서 부산쪽에 자동차 공장 유치운동을 벌였었다. 90년대 초반부터 자동차 사업 진출을 시도하던 삼성은 오너 일가의 연고지인 대구에 상용차 공장을, 부산 신호공단에 자동차 공장을 지었고, 삼성자동차는 94년 12월 인가를 받아냈다. 여기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YS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시민들의 여론몰이 작업도 한몫했다. 강씨도 YS 말기에 경제부총리를 지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강씨가 삼성에 호의적이었을 것이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삼성은 정계의 실세를 우호적으로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당시 여야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씨나 이회창씨 모두 ‘삼성의 기아 인수에 가능한 한 도움을 주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의 막강한 ‘교섭력’이 새삼 돋보이는 대목이다.
상황이 이랬음에도 삼성은 자동차 사업을 왜 포기했던 것일까.
삼성자동차의 첫 모델 SM5가 선보인 것은 98년 3월. 그리고 부도난 기아차의 새 주인을 찾기 위한 국제 입찰은 98년 여름에 있었다. 첫 입찰에서 삼성은 기아차 인수에 적극적이었지만, 두 번째 입찰에는 소극적이었다. 사실상 기아차 인수를 포기한 것이고, 이는 삼성그룹에서 자동차 사업 퇴출로 이어졌다.
98년 12월 당시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 입에서 ‘삼성차 빅딜론’이 나왔고, 이는 삼성과 대우의 가전-자동차 빅딜협상으로 이어졌지만, 삼성은 99년 6월 삼성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건희 회장은 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장에 SM5를 타고 갔다. 삼성의 자동차 사업에 대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여름까지도 그랬다. 그러다 그해 10월19일 3차 입찰을 포기했다. 자동차사업을 포기한 것이다. 10여 년 동안 공들인 사업을 두어 달 만에 완전히 입장을 바꿔 퇴각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삼성 고위층에서 치열한 세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그룹 내 자동차 사업 유지파와 퇴출론자들이 대립을 벌인 것. 이 퇴출론의 중심은 이학수 부회장이었다. 애초 그는 삼성이 자동차 사업 진출을 결정할 때도 맨앞에 서있었다. 삼성자동차의 고위급 임원 출신인 Q씨는 “이 부회장이 98년 DJ 정부 출범 당시 DJ 최측근을 상대로 삼성의 자동차 사업 당위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득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삼성자동차의 장래가 불투명해지자 반대쪽 맨앞에 선 것.
이 과정에서 녹취록에 등장하는 홍석현 전 회장도 이 회장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이 삼성의 자동차 퇴출 결정의 지지를 얻어 내기 위해 홍 전 회장의 지지부터 받아냈다는 것이다. 그만큼 홍 전 회장이 이건희 회장에게 주요한 조언자라는 얘기다.
녹취록에서 홍 전 회장은 삼성의 고위 의사 결정과정에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에 대해 삼성 주변에선 홍 전 회장에 대해 “최고위급 전문경영인을 뛰어넘는 예우를 받지만 오너는 아닌 독특한 위상”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삼성은 이번 도청 테이프에 담긴 녹취록 중 유독 기아차 문제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필이면 김우중씨도 현재 대검 중수부의 수사를 받고 있다. 당연히 대우그룹 몰락에 대해 검찰의 수사가 진행중이다. 여기에 녹취록 공개로 기아차 몰락 과정도 검찰의 수사대상이 됐다. 두 그룹의 몰락에는 공통된 ‘루머’가 있다. 바로 ‘삼성 개입론’이다. 삼성은 이에 대해 펄쩍 뛰고 있다. 대출금 수치까지 내세워 반박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삼성에선 과거 자동차사업에 관련된 퇴직임직원들의 동향체크에도 나섰다. 자동차 사업 퇴출과 관련해 그룹 내에서 갈등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번 도청 녹취록 파문이 어디까지 번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