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위기는 곧 나의 기회”
세계 1위 자동차그룹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 사실이 밝혀지면서 경쟁 관계에 있던 현대·기아차의 수혜 여부가 관심을 끌고 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 현대차 유럽연구소를 방문하여 현장경영을 펼치고 있다.
세계 1위 자동차그룹인 폭스바겐그룹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주력엔진인 4기통 TDI(터보직분사) 디젤엔진을 탑재한 리콜(recall) 차종의 미국 판매를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18일 미국환경보호청(EPA)으로부터 배기가스 조작으로 대규모 리콜 명령을 받은 지 이틀 만에 소비자 사과와 함께 나온 결정이다. 리콜 사유는 배기가스 정기검사 때만 유해 배기가스 배출저감시스템을 가동하고, 평소 운행 때는 이 시스템을 가동하지 않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해 실연비를 조작한 것이 적발됐기 때문이다.
EPA의 리콜 명령을 받은 차종은 제타(Jetta, 2009~2015년식), 비틀(Beetle, 2009~2015년식), 골프(Golf, 2009~2015년식), 파사트(2014~2015년식), 그리고 아우디(Audi) A3 (2009~2015년식)다. 폭스바겐그룹은 아우디와 포르셰 등도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다.
문제가 된 차량들은 미국에서 모두 48만 2000대가 팔렸다. 최악의 경우 미국 법규상 최대 대당 3만 7500달러, 총 180억 달러(21조 원)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다. 폭스바겐그룹의 지난해 순이익은 123억 달러(약 14조 원)였다.
벌금 외에 리콜비용, 판매중단 손실, 브랜드 이미지 훼손 등까지 감안하면 피해 규모는 더욱 늘어날 수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엔진은 폭스바겐그룹에서 주력 제품 중 하나다. 재정적 부담 외에 제품개발 일정에도 엄청난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
올 들어 8월까지 폭스바겐그룹의 미국 판매량은 약 40만 대로, 94만 대인 현대·기아차보다 적다. 게다가 미국에는 디젤차 인기가 높지 않다. 미국만 따지면 현대·기아차가 이번 사태로 얻을 반사이익이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각을 넓히면 현대·기아차의 수혜 범위는 상당하다. 익명의 한 자동차 애널리스트는 “사실 현대차그룹의 디젤 기술은 독일에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이 때문에 신흥시장, 특히 국내에서 최근 몇 년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독일 자동차 브랜드 가운데 디젤 연비 경쟁력이 가장 높았던 폭스바겐이 발목을 잡힌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다”라고 평가했다.
실제 주요 자동차업체별 아시아·신흥시장 판매 비중을 보면 폭스바겐이 31.5%, 현대차와 기아차가 각각 23.6%, 31.4%다. 폭스바겐의 골프, 제타, 파사트 등은 현대차 액센트, 아반떼, 쏘나타와 기아차 프라이드, K3, K5와 직접 경쟁하는 차종이다. 국내 수입차업계 한 관계자는 “현대기아차가 가장 신경 쓴 수입차 브랜드는 폭스바겐이다. 벤츠나 BMW는 프리미엄 브랜드여서 시장이 다르고, 도요타 등 일본차는 반일감정 등 때문에 국내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대하기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폭스바겐은 대중 브랜드로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과 유로 약세 등에 힘입어 국내에서 차량을 생산하는 GM이나 르노삼성 못지않은 점유율을 노릴 만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 21일(현지시간) 독일 증시에서 폭스바겐 주가가 20% 가까이 폭락한 직후 22일 현대차와 기아차 주가는 급등했다. 현대·기아차 주식을 공격적으로 사들인 매수 주체가 최근 우리 증시에서 매도 공세를 이어가던 외국인이란 점도 눈길을 끈다. 글로벌 차원에서 이번 사태의 수혜로 현대·기아차를 주목한 셈이다.
이번 사태는 폭스바겐뿐만 아니라 독일차 전반에 대한 이미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21일 독일 증시에서는 폭스바겐 외 벤츠, BMW 등의 주가도 일제히 약세를 보였다.
일부 외신은 이번 폭스바겐 사태가 회사 측이 고의로 조작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사태 발생 후 독일 정부까지 직접 나서 진화에 나섰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가 결코 쉽게 넘어가기는 힘들어 보인다.
2000년대 초반 미국 포드는 타이어결함으로 인한 전복 사고로, 2009~2010년에 일본 도요타는 대규모 리콜로 수년간 심각한 경영난을 겪어야 했다. 현대차도 지난 2012년 연비논란을 겪었지만, 이후 연비 관리를 강화하면서 이번 사태의 불똥을 맞을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많다.
자동차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연비가 좋은 독일산 디젤차량이 많이 팔렸던 이유 가운데는 고유가도 있다.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부터 국제유가가 크게 떨어지면서 디젤차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이런 때 독일산 디젤차의 문제점이 불거진 것은 휘발유 차량에서의 경쟁력이 양호한 현대·기아차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다”라고 풀이했다.
현대기아차 현 주가도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이다. 지난 22일 현재 현대차의 시가총액은 36조 원, 기아차는 21조 5000억 원 수준이다. 현대차의 상반기 당기순이익은 3조 1800억 원, 기아차는 1조 5300억 원이다. 상반기만큼만 해도 연간 6조 원과 3조 원을 너끈히 넘을 가능성이 크다. 작년 연간 순이익은 현대차 4조 9000억 원, 기아차가 2조 4000억 원이다. 상반기만큼만 해도 20% 이상 이익이 늘어난다. 이 기준으로 하면 현재 주가수익비율(PER, 주당순이익 대비 주가가 몇 배냐를 나타내는 지표)은 7.2배가량이다. 우리 증시 평균 PER은 약 9.8배다.
현재 증권사들의 목표주가를 보면 현대차가 약 20만 원 안팎, 기아차가 6만~7만 원 선이다. 현 주가인 16만 원대 중반, 5만 원대 초반 대비 상승 여력이 꽤 크다. 그나마 이 같은 목표주가는 이번 폭스바겐 사태가 터지기 전에 제시된 것이다.
신정관 KB증권 연구원은 “그동안 주가의 발목을 잡았던 요인이었던 한전부지 인수가 완료된 후의 3분기 실적발표를 통해 재무건전성이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그룹의 고정투자가 정점을 지나면서 재무부담도 줄어 배당 여력도 한층 더 커질 것으로 기대할 만하다”고 조언했다.
현대차는 지난달 7월 보통 1주당 1000원의 중간배당을 결정하면서 배당성향을 향후 단기적으로는 국내 상장사 평균인 15%,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의 수준인 30%까지 확대할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 현대차의 배당성향은 11%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