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쿠데타’로 판정승?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제2의 유승민이 될 순 없다.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김무성 대표가 9월 30일 의원총회에서 “더 이상 모욕은 참지 않겠다”며 분통을 터트린 직후 기자와 통화한 비박계 한 의원은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 여야 간 합의(안심번호 국민공천제)→친박계 반발→청와대 입장 표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국회법 개정안을 놓고 벌어졌던 ‘유승민 파동’과 묘하게 닮아있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김 대표를 유 전 원내대표처럼 축출하겠다는 여권 핵심부 전략을 간파했다는 얘기다.
비박계 의원은 “박 대통령은 의원과 대표 시절 그 누구보다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당 운영을 주장했던 정치인이다. 지난 정권엔 앞장서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맞서지 않았느냐”면서 “그런데 지금은 마치 당을 청와대 부속품 정도로 여긴다. 오죽하면 새누리당은 청와대 거수기라는 표현까지 나왔을까. 그래도 집권당 대표가 야당 대표와 만나 협의한 사안인데 청와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하는 행태는 ‘무대’를, 아니 정당 중심제를 무시하는 것으로밖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대표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한 청와대 기류 역시 냉랭하긴 마찬가지다. 이번 기회에 ‘김무성 체제’를 갈아엎자는 과격한 목소리도 들린다. 이는 김 대표와는 더 이상 ‘한 배’를 탈 수 없다는 입장으로 받아들여진다. 박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의 친박계 원로 인사는 “김 대표로는 정권재창출, 그리고 더 나아가 박 대통령 퇴임 후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결론이 섰다. 김 대표 쪽이 강하게 저항하겠지만 우리 역시 후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권당 대표와 현직 대통령이 공천 룰,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략공천 여부를 놓고 정면충돌하는 형국인 셈이다.
김 대표가 문재인 대표와 ‘부산 9·28 회동’을 통해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발표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권 핵심부 기류가 이렇게까지 격앙되진 않았다고 한다. 앞서의 친박계 원로 인사는 “김 대표가 박 대통령과 손을 잡느니 중학교 1년 후배 문 대표를 택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김 대표가 박 대통령 ‘뒤통수’를 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친박 의원 역시 “청와대가 분명 안심번호는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김 대표에게 보냈다. 그런데 (김 대표가) 박 대통령이 순방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밀어붙인 것이다. 한 번 해보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언성을 높였다.
지난달 30일 ‘안심번호 국민공천제’에 대한 친박 측과 비박 측 간의 대립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사실 양측간에는 전략공천을 놓고 물밑 논의가 ‘은밀히’ 오갔었다고 한다. 여권 주변에선 청와대의 지분 30석 요구를 김 대표가 수용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김 대표가 전략공천 방안을 일부 받아들이는 대신 박 대통령으로부터 ‘차기’를 보장받는, ‘빅딜’ 가능성이 제기됐던 것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28일 문 대표와의 단독회동 이후 30일 의총 직후 “전략공천은 없다”며 마이웨이를 선언했다. 친박계가 사활을 걸고 있는 전략공천에 대한 협상 자체를 원천 차단한 것이다. 청와대가 “김 대표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며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는 이유다. 이는 여권 핵심부가 김 대표를 향해 전면전을 선포한 배경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친박 내부에선 내년 총선을 비대위 체제 하에서 치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물론 김 대표 퇴진을 전제로 하고서다. 의석 구조로는 열세인 친박이 이런 시나리오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8명 최고위원 가운데 김 대표와 황진하 사무총장 정도를 제외한 6명(서청원·이정현·김을동·김태호·이인제·원유철)은 친박 또는 범친박으로 분류된다. 친박 최고위원들이 당무를 거부하거나 또는 동반 사퇴를 선언할 경우 김 대표 체제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친박계 좌장인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여의도 컴백이 가까워지면서 비대위 출범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김 대표 역시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다. 현직 대통령과 맞서면 청와대로 가는 길이 험난할 것이란 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비박 의원들이 수적으로 우위에 있긴 하지만 이는 ‘허수’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비박’이라는 명칭부터가 친박에 대항하는 개념이다. 즉, 친박이 박 대통령에 대한 로열티로 똘똘 뭉친 집단이라면 비박은 여러 세력이 합쳐진 진영이다. 친박에 비해 느슨할 수밖에 없다. 이는 향후 친박과의 일전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을 향해 승부수를 던졌다. 제2의 유승민이 되느냐 아니면 전면전을 벌이느냐의 양자택일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다. 김 대표는 그동안 청와대와 맞붙었던 두 차례 갈등에서 모두 고개를 숙였다. 지난해 10월 상하이발 개헌 언급, 올해 5월 유승민 파동 때 김 대표는 청와대를 뛰어 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YS 밑에서 ‘보스 중심 정치’를 배운 김 대표의 한계라는 지적이 나왔다. 또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며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김 대표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 대표 측은 “조금만 두고 보라”며 여지를 남겨두긴 했지만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김 대표 측으로 분류되는 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김 대표가 두 번(상하이 개헌 발언, 유승민 파동)이나 모욕을 참으면서 힘을 비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박 대통령이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진 않을 것”이라면서 “(친박계는)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이 싸우면 누가 이겼는지 과거 사례를 찾아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가장 큰 원군은 ‘당심’과 ‘여론’이다. 새누리당 의원들 사이에선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뽑은 김 대표마저 제2의 유승민으로 만들 수 없다는 기류가 강하게 흐르고 있다는 전언이다. 또 지금까지 계속 박 대통령에게 ‘깨지기만’ 했던 김 대표에 대한 동정론도 감지된다. 새누리당 중립 성향의 한 의원은 “박 대통령이 마치 집권당 대표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다. 또 박 대통령을 믿고 설쳐대는 몇몇 친박 의원들도 성토 대상이다. 박 대통령을 향해 공개적으로 말은 못하고 있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무대’ 쪽에 설 의원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면서 “김 대표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역시 이러한 당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새누리당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영남권 지지자들 역시 박 대통령보다는 김 대표에게 손을 들어주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는 당혹해하고 있다. 이번에도 박 대통령이 손을 높이 들면 조용해질 것으로 예상했던 김 대표 측이 의외의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여권 내부는 물론 핵심 지지기반인 영남권 민심 이반 현상도 심상치 않다. 청와대가 재빨리 김 대표와의 확전 자제를 모색하며 ‘숨 고르기’에 들어간 까닭이다. 여권 핵심부 인사는 “더 이상 전쟁할 경우 함께 죽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면서 “김 대표가 ‘모든 안을 논의하겠다’며 한발 물러서고 청와대도 수그러들어 전면전은 피한 것은 정말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겉으로 봤을 땐 양측이 서로 한 발 물러선 듯한 모습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청와대가 김 대표 기세에 밀렸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박-무 전쟁’ 1라운드’에서 김 대표가 박 대통령을 근소한 차이로 눌렀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전초전일 뿐이다. 박 대통령과 김 대표가 같이 갈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이상 언제든 싸움은 재현될 수밖에 없다. 특히 김 대표로부터 역공을 받으며 자존심을 구긴 청와대의 반격 카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진 못하더라도 낙선시킬 순 있다”는 말을 여권 핵심부가 김 대표를 떠올리며 곱씹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김 대표 역시 모처럼 잡은 ‘승기’를 내년 총선, 그리고 대선 때까지 이어가려 할 것으로 보인다. 이래저래 여권 국정 주도권을 둘러싼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전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