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고 당사자를 항공안전 파수꾼으로
1999년 승객과 승무원 154명을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가 포항공항에 착륙하다가 활주로를 이탈, 방화벽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진은 사고 당시 모습.
비가 내리고 강풍이 몰아치던 지난 1999년 3월 15일 오전 11시 30분께. 1시간 전 김포공항을 떠난 대한항공(KAL) 1533편이 포항 상공에 도착했다. 해당 비행기는 기상 상태 등으로 인해 11시 45분께가 되고 나서야 1차 착륙 시도를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기수를 돌려 14분 동안 포항공항 상공을 선회하던 이 비행기는 두 번째 착륙을 시도했고, 결국 활주로에 내렸다. 그런데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멈춰 설 줄 모른 채 계속 미끄러졌다.
해당 비행기는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활주로 끝에 위치한 계기착륙장치 안테나(LOC) 10여 개를 차례로 부쉈다. 이어 활주로를 100m가량 벗어나 철조망이 쳐진 6m, 폭 13.5m의 흙으로 된 방호벽을 뚫고 나가 맞은편 언덕에 부딪치고 나서야 가까스로 멈췄다. 사고 현장은 처참했다. 기체 중간 부분은 위에서 찍어 누른 것처럼 꺾여 두 동강이 났다. 조종실과 날개, 꼬리 부분 등 기체의 3분의 1가량이 파손됐다. 다행히 폭발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해당 비행기에는 승무원과 승객 등 154명이 타고 있었는데 승객 가운데에는 당시 포항제철 이구택 사장과 임원 5명도 있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중상 19명, 경상 14명의 인명피해, 210억여 원 규모의 항공기 파손, 1억 6000만 원 상당의 공항시설 등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포항공항은 이날부터 이틀 동안 사고 수습을 위해 공항을 폐쇄했다.
반면 일각에선 “배풍은 항공기 제동거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기장은 착륙 시 이를 반드시 고려했어야 한다” “운항 규정상 사고 기종인 md-83은 배풍 10노트(18㎞/h)가 초과 됐을 때 착륙 자체를 시도하면 안 된다” “사고 1시간 전 아시아나 여객기는 포항공항에 아무 문제없이 착륙했다” 등 조종사 과실에 무게를 두기도 했다. 악천후에 무리하게 비행을 강행한 항공사 측에 책임을 묻기도 했다.
그런데 국토부는 사고 발생 2개월 만에 포항공항 사고 원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앞서 지난 1997년 8월 괌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801편 보잉 747-3B5 활주로 착륙사고를 2년 3개월간 조사했던 미국 NTSB(교통안전위원회)와 비교하면 이례적이었다.
당시 국토부는 “포항공항의 활주로 이탈사고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은 조종사 과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국토부는 사고 여객기의 조종사였던 A 기장에 대해 운송용 종사자로서의 자격증명을 취소하는 등 행정 조치를 내렸다. A 기장은 국토부 발표 이후 대한항공 창사 이래 최초로 파면 조치를 받았다.
이처럼 포항공항 사고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이 사고 여객기 기장에 있다며 강력한 행정 조치를 내린 국토부가 A 기장을 ‘항공안전감독관’으로 임명한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국토부에서 발간한 ‘항공안전감독관 업무규정’을 보면 항공안전감독관은 항공기 감항, 운항분야의 인가·증명·승인 또는 항공안전저해요소를 제거하는 ‘안전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항공운전감독관은 항공사에 시정지시, 개선권고를 내릴 수 있고, 기장에 대해 현장시정도 내릴 수 있다.
한 항공사의 현직 기장은 “항공안전감독관은 비행기에 감독관 자격으로 탑승해 이륙부터 착륙까지 비행에 대한 모든 과정을 감독한다. 규정에 위배되거나 잘못된 경우가 있다면 해당 내용을 항공사에 보낸다. 감독관이 탑승한 날에는 기장을 비롯해 승무원 모두가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현직 기장은 “대형 항공사고를 냈던 당사자가 비행 안전에 대한 관리·감독을 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A 항공안전감독관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난 2012년 항공안전감독관 채용 소식을 듣고 이력서 제출부터 면접까지 모든 절차를 거쳤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 이후 지난 2000년부터 소송에만 몰두했다. 그 사이 타 항공사에서 제의도 오고, 주변 사람들이 자리를 알아봐주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기장은 한 번 사고가 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느꼈다. 지난 2003년 대법원 판결 이후 책 판매 영업, 작은 개인 사업 등을 하다 2012년 감독관에 지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국토부 측도 절차에 따라 채용했다는 입장이다. 국토부 운항안전과 관계자는 “항공안전감독관은 국가공무원이다. 따라서 공무원으로 임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공무원은 국가공무원법 등 법률에 근거해서 채용한다. 감독관의 경우 채용 당시 시점과 기준에 대해 결격사유 등에 해당하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가공무원법 제33조 결격사유’에는 벌금형에 대해 ‘공무원으로 재직기간 중 직무와 관련하여 형법 제355조 및 제356조에 규정된 죄를 범한 자로서, 3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그 형이 확정된 후 2년이 지나지 아니한 자’라고 명시돼 있다.
“항공 사고 이력과 그에 따른 면허 취소 이력이 있어도 감독관 자격 요건을 충족하는가”라는 질문에도 앞서의 관계자는 “국토부에서 발간한 항공안전감독관 업무규정을 보면 자격요건이 명시돼 있다. 마찬가지로 채용 당시 해당되는 내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항공안전감독관 업무규정을 보면 항공안전감독관 자격요건은 항공운송 분야에서 5년 이상 근무 경력을 보유해야 하며, 국제항공운송사업자의 경우 최소 비행시간 3000~5000시간 이상(국내 1000~2500시간), 운항관리사 또는 항공정비사 자격증명 등이 필요하다. 다만 사고 이력과 면허 취소에 대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