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누군가 걸린다’ 수백년째 공포 반복
일본 기이반도의 한 산골마을 주민들이 오래 전부터 정체 모를 희귀병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기이반도의 푸른바다 전경.
일단 발병하면 루게릭병과 비슷하게 손발을 움직일 수 없고, 스스로 밥조차 먹을 수 없게 된다. 나중엔 뜻 모를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급기야 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닐까’하고 두려움에 떠는 주민도 많다.
이 특수한 질병의 이름은 기이반도의 지명을 따 ‘기이 ALS/PDC’로 불린다. ALS은 흔히 루게릭병으로 알고 있는 근육위축가쪽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을, PDC는 파킨슨병과 치매를 의미하는 복합어다. 다시 말해 기이반도에서 발병하는, 루게릭병과 파킨슨병 그리고 치매가 합쳐진 병이란 뜻이다.
하지만 원인을 몰라 전문가들도 “미스터리한 병”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황. 수년간 동질병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미에대학교 교수 고쿠보 야스마사 씨는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에 발병해 20대에 사망한 사례도 있어 더욱 무서운 병”이라고 전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환자의 뇌를 살펴보면 모두 같은 병변(病変)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에서 발견되는 ‘타우 단백질’이란 물질이 희한하게도 ‘기이 ALS/PDC’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뇌세포 속에서도 비정상적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이 확인됐다. 참고로,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는 루게릭병이나 파킨슨병처럼 거동이 불편해지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이런 정황상 ‘기이 ALS/PDC’병을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사촌쯤으로 보기도 한다.
괌 해변.
병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다. 계기는 기이반도에서 약 2500㎞ 떨어진 괌 남부에서도 똑같은 병이 다발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단 두 곳. 일본과 괌에서 ALS와 치매 발병 다발 지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많은 전문가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가장 먼저 검토된 것이 지역 환경에 ‘뭔가’ 있는 게 아니냐는 가설이다. 일단 식수로 마시는 물이 의심됐다. 1960년대 현지조사를 했던 와카야마현립 의과대학의 기무라 기요시 명예교수는 강물이 이상하리만치 깨끗하고 수초나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수질조사 결과 해당 지역의 물은 미네랄 함유량이 매우 적었으며, 특히 칼슘과 마그네슘 함량이 크게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미네랄 함유량이 적은 물을 오랫동안 섭취할 경우 영양부족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괌 지역의 물에서도 칼슘과 마그네슘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 “만성적인 미네랄 부족이 뇌신경세포 파괴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가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식수와 농업용수의 수원지를 바꾸거나 우물물을 사용하지 않는 등 실질적인 대책마련이 이뤄졌다.
물뿐만 아니라 음식 역시 원인으로 의심됐다. 한 연구자는 “해당 지역 주민들이 오래된 건어물 등 산화한 음식을 주로 먹고 있다”고 밝히며 이것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연구 성과에 힘입어선지, 1980년대에 들어서자 환자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괌에서는 급격히 환자 수가 줄어들어 사태가 종식되는 듯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1990년대 다시 환자가 늘어나기 시작. 더욱이 고령자 증가와 함께 치매 증상을 보이는 환자 수가 5배까지 치솟았다. 물이나 음식이 여러 원인 중 하나였을지 모르나 결국 ‘진범’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이 병에는 불가사의한 점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다발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에 이 병이 발병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유전병’이 아니냐는 의견도 제기됐다. 실제로 환자들 가운데 일부는 ‘C9 혹은 f72’라 불리는 유전자에 변이가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 유전자치료 연구자인 가쿠신 교수는 “이 유전자 변이는 북유럽 사람들에게 가장 많으며 그 다음이 괌과 뉴기니 사람들로, 본래 일본인에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기이반도 출신 환자들에게서는 벌써 3차례나 이 유전자가 발견됐다는 것. 그는 “추측이지만 먼 옛날 북유럽인들이 태평양을 건너 괌과 일본의 기이반도로 흘러와 이 병의 유전자가 들어왔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유전자가 진짜 원인일까.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다. 보통 한 지역에서 병이 다발할 경우 반드시 많은 환자에게서 공통의 원인 유전자가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이 ALS/PDC’ 병은 아직까지 그것을 찾질 못했다.
환경도 아니고, 유전자도 원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확실히 특정지역에서는 병이 다발하고 있다. 의학사상 드문 이 미스터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다. 고쿠보 교수는 “어쩌면 발병에 새로운 메커니즘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 유전자연구 외에 iPS세포(역분화 줄기세포)를 사용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만일 이 병의 정체를 알게 되면 오랫동안 시달려온 지역주민에게는 낭보일 뿐 아니라 일반적인 치매나 루게릭병, 파킨슨병과 같은 뇌신경의 난치병에도 치료의 길이 열릴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