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
김무성 대표가 지난 13일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 방문에 나서는 박근혜 대통령을 환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석에서 만난 부산·경남(PK)의 한 재선 의원은 작금의 당 분위기를 전하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작심 디스(Disrespect·폄하)했다. 지난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으로 날아간 박근혜 대통령을 환송도, 환영도 않더니 이번에는 국회 본회의가 버젓이 열리고 있음에도 성남 서울공항까지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면서 내심 못마땅하다는 표현을 여러 번 했다.
‘대통령이 나라 밖으로 나갈 때 늘 그래왔다’며 기자들이 관행 아니냐고 하자 이 의원은 “지난해에 전당대회 할 때의 김 대표가 아니다”며 “청와대에 지나치게 저자세(Low-key)인 점이 꼴 보기 싫다”고도 했다. 요즘 무대(김무성 대장)를 바라보는 여당 내 시각이 이렇듯 곱지 않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 대통령을 영접하고 온 김 대표의 표정은 한마디로 ‘밝았다’. 박 대통령과 어떤 얘기를 나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비밀이다”며 그 내용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김 대표는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눴다”, “언제 (우리) 사이가 나빴던 적이 있나”, “대통령과 저는 그런(나쁜) 관계가 그동안 아니었다” 등의 답변을 하며 시종일관 미소를 지어보였다. 특유의 “흐흐”하는 웃음과 함께.
이런 김 대표를 보며 비박근혜계 내에서 20명 안팎의 세력을 형성했던 ‘김무성계’에 이탈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는 전언이 나온다.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김학용 김성태 의원 등을 빼고는 김 대표를 옹호하는 ‘입 큰 개구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무성계로 꼽히는 영남권의 한 재선 의원은 “솔직히 말해 김 대표를 보고 ‘못 믿을 사람’이라고 우스개로 이야기하는 의원이 없다고 말하지 않겠다”면서 “대표 입에서 전략공천, 우선추천지역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얼어붙은 의원들이 몇 있긴 하다”고 전했다.
여야 동시 오픈프라이머리가 야당의 비협조로 무산된 뒤 김 대표는 안심번호를 활용한 100% 여론조사라는 플랜B를 꺼내들었다. 그마저도 친박계의 반대에 부딪치고, 친박계 맏형격인 서청원 최고위원이 공천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면 “앞으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꺼내자 김 대표 입에서 “우선추천지역도 가능하다”는 취지의 인터뷰가 나온 것이다.
앞서의 김무성계 의원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이 물러난 감이 없지 않다”면서 “오픈프라이머리 관철을 통해 현역들을 대거 살릴 것이라 믿었던 의원들, 무대가 나를 구원하리라고 떠들었던 의원들이 뜨악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주겠다는 취지로 김 대표가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한 오픈프라이머리는 단연 현역들에게 유리한 공천제도다. 지역구를 책임질 인지도를 따졌을 때 현역이 우세하다는 것은 예외 없는 정설이었다. 하지만 그 말만 믿고 책임당원 확보를 등한시했던 일부 의원들은 최근 꼬리에 불붙은 송아지처럼 지역구를 들락거리고 있다. 친박계가 당원(50)과 국민(50)의 뜻을 반영한 현행 당헌당규상의 공천룰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무성 때문에 망했다”는 곡소리가 흘러나오는 이유다.
김 대표가 이혜훈 전 의원이라는 ‘메신저’를 통해 유승민 전 원내대표에게 SOS를 쳤지만 유 전 원내대표 측은 꿈쩍도 않고 있다고 한다. 유 전 원내대표 주변부에선 한번 배신한 사람을 쉽게 믿을 수 있느냐며 돌다리를 두드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김 대표는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며 박 대통령이 국회법 거부권을 행사한 당시 유 전 원내대표의 편에 섰다가 박 대통령이 유 전 원내대표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자 태도를 바꾼 바 있다. “당청은 공동운명체이자 한 몸으로 박근혜 정부의 성공이 곧 새누리당의 성공임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라며 유 전 원내대표를 평의원으로 내려앉힌 장본인이다.
리더십의 위기에 몰린 김 대표로선 ‘K(김무성)-Y(유승민)라인’의 재결합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유 전 원내대표가 대구·경북(TK), 특히 대구에서만큼은 차세대리더로 꼽히는 데다 지난 거부권 파동에서 보듯 중도층으로의 세력 확장에 키(key)를 쥐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극보수층의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김 대표의 행동반경이 넓어지려면 중도층으로 세력을 확장해 지지율을 높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수도권 의원 중 일부도 유 전 원내대표의 ‘중도보수’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나 친박계와의 기싸움에서 좋게 말하면 양보, 달리 말하면 후퇴만 거듭한 김 대표를 두고 정가의 호사가들은 “뼛속 깊이 평화주의자이거나 투쟁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는 스타일이 아닐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치권 사정에 밝은 한 여권 인사는 박 대통령에게 맞서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김 대표의 지난 시간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상도동계의 막내로, 선배들의 구두를 정리하는 일로 정치를 시작한 김 대표는 권력의 무서운 속성을 잘 알고 있다. 현재권력에 맞섰다가 나가떨어진 선배들을 숱하게 봐 왔을 것”이라며 “결국 이회창, 박근혜같이 현재권력(김영삼, 이명박)에 맞서 힘을 쌓아가는 길은 가지 않고 후계자로 옹립되는 길을 걸어가려 하지 않겠느냐”고 관측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 씨는 김 대표를 두고 “YS 문하생이라는 (김무성) 현 대표는 유전자가 틀렸거나 감히 현 권력에 맞설 결기가 없는 모양이다. 집권당 대표는 야당 대표와는 다르게 현재권력과 상대해야 한다. 과거 YS는 당시 대통령에게 굳건히 맞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해냈다”면서 “(김무성은) 어설프게 대권은 꿈도 꾸지마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남기기도 했다. 김 대표는 현재 상도동계에서도 고립무원 상태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김 대표가 박 대통령의 염원인 ‘아버지 재평가’를 위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올인하는 대신 공천룰을 결정할 특별기구 위원장에는 김 대표가 미는 황진하 사무총장을 기용키로 했다는 일종의 ‘딜’설을 제기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문제가 노동개혁이나 경제살리기, 민생챙기기 등 모든 현안을 뒤덮고 있음에도 지금이 아니면 마치 죽기라도 하듯 올인하는 모습을 두고 여러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는 와중이다.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의 미국 순방에 청와대 정무특보인 윤상현 김재원 의원이 동행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 의원은 특히나 최근 ‘반기문 대망론’을 거론하면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김 대표를 비토한 장본인이다. 이를 두고 정가에서는 “윤 의원 보기 싫어서라도 안 갈 수 있었는데 그걸 다 참고 감내하며 인사를 하러 갔다. 그게 바로 김무성 스타일”이라고 했다. 좋게 말하면 통 큰 남자지만 나쁘게 말하면 박 대통령 순방을 영접하지 않는다는 두 번째 지적을 감내할 배짱이 없다는 뜻이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