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 할배들 뿔나게 해놓고 “질본아, 왜 생까냐”
13일 오후 서울 중구 보건소에서 어르신들이 독감 예방접종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방역 당국은 올해부터 전국 1만 5000여 지정 병원에서도 65세 이상 노인들이 독감 예방접종을 맞을 수 있다고 홍보했으나, 이날 현재 백신을 보유한 지정 병원은 6000여 곳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
“노인 독감 공짜로 의원 가서 맞으라고, 광고했으면 백신이라도 잘 챙겨야 할 것 아니야?”
김 씨의 글에는 질본을 향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김 씨는 “예상을 못했다고? 그럼 각 병·의원마다 예상수요량 입력하라고 한 거는 뭔데…”라며 “신청한 만큼이라도 줬냐? 산동네서 휠체어 타고 내려온 할머니들 돌려보내는 의사들 마음 니들이 알기나 하겠냐”고 항변했다. 그는 글 말미에서 “일은 저질러놓고 전화기 꺼놓으니까 좋냐? 무슨 X나잇하고 생까는 거냐”는 말도 보탰다.
김 씨가 분노한 이유는 뭘까. 김 씨는 대구 지역 S 의원 개원의. S 의원은 질본이 시행 중인 ‘노인인플루엔자 국가예방접종사업’의 지정의료기관이다. 질본은 이달 1일부터 다음달 15일까지 만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지정 의료기관(병·의원) 1만 5300여 곳에서 무료로 인플루엔자(독감) 예방접종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난해까지 각 지역의 보건소가 담당했다. 하지만 노인들이 보건소에 한꺼번에 몰리면서 장시간 대기하거나 안전사고 문제가 터졌다. 질본은 올해부터 이 사업을 민간 병·의원으로 확대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일반 병·의원의 의사들이 질본에 신청해 ‘지정의료기관’이 되면, 보건소로부터 독감 백신을 받아 노인들에게 무료로 접종 주사를 놓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병·의원은 65세 이상 예상 내원자의 백신 예상소요를 제출했다. 질본은 8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각 지역의 보건소를 통해 이 사업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경기도의 한 보건지소 관계자는 “계속 홍보를 했다. 아파트, 빌라 관리소에 전부 팩스를 보내 게시판에 붙어있게끔 했다”며 “이장님 회의, 노인분회회의를 찾아다니면서 알렸다”고 밝혔다.
문제는 10월 1일 첫날부터 독감 백신 부족 현상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 특히 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농·어촌 지역의 개원의들은 백신 부족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앞서의 김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는 백신 500개 신청했는데 200개가 왔다. 왜 반밖에 안 왔냐고 보건소에 연락해보니까 전화도 안 받았다”며 “욕한 부분은 분명 잘못이지만 질본도 하루 종일 통화중이라 너무 답답했다”고 밝혔다. 그는 “차비 물어내라는 사람도 있고 환자들하고 싸움이 나서 진료를 못 볼 지경이다. 하루에 100명씩 돌려보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 씨와 같은 개원의들은 10월 1일 이전부터 ‘단골 어르신’들을 상대로 ‘노인인플루엔자 국가예방접종사업’을 알렸다. 그런데 질본이 충분한 양의 백신을 보내주지 않아 환자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꼴이 된 것.
서울 구로구의 개원의 A 씨 역시 “저 같은 원장들이야 그냥 말 한마디 하면 되지만… 접수하고 있는 직원이나 간호사들은 사실 어떻게 보면 감정노동자들이다”며 “이분들이 환자 돌려보내면서 울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히 ‘의원급’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장은 기자와 만나 “우리도 마찬가지다. 백신양이 충분치 않다”며 “질본이 신청한 만큼의 백신을 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사업시행 이전부터 예상수요량을 파악했는데도 백신 부족 현상이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개원의들은 질본이 백신 수요 예측에 완전히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대한의원협회 송한승 부회장은 “보건소에서 맡았던 사업이 일반 개인 병의원으로 옮겨가면 안 하던 어르신도 할 거고, 민간 접종하던 분들도 국가지원이라 몰려올 것이 뻔하다”며 “그런데도 질본은 백신 신청물량의 절반도 배송해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질본 관계자는 “이미 초기에 병·의원 의사들에게 1차분 60%만 드리고 적정추이를 보고 나머지 40%를 부족한 곳에 배분한다고 공지했다”며 “사업 시행이 초기이다 보니 지역 간 접종자수를 예측할 수가 없어 백신신청분의 60%만 준다고 했던 거다”고 해명했다. 대구지역의 한 보건소 관계자도 “같은 지역 안에서도 백신을 40개 보냈는데 접종을 불과 몇 개밖에 못한 의원이 있는 반면에 40개 다 사용한 의원도 있다”며 “의원들이 환자가 얼마나 오는지 예측하지 못한다. 그래서 질본이 신청분의 60%만 준다고 했던 것이다. 또 추가 신청이 가능하기 때문에 염려할 일이 없다”고 설명했다.
질본과 보건소 측의 이 같은 주장이 과연 ‘사실’일까. 앞서의 개원의들은 “백신 신청분의 60%만 지급한다”는 질병관리본부의 공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김 씨는 “그런 공지는 처음 들었다”고 반박했다. A 씨 역시 “신청당시 60%만 준다는 걸 우린 몰랐다. 예측 수요량도 딱 필요한 만큼 신청했다. 오히려 협조한 사람들이 바보가 됐다”고 반박했다. 대한의원협회 송한승 부회장은 “저는 이번 ‘노인인플루엔자 국가예방접종사업’을 위한 회의에 참가한 당사자였다”며 “제가 몰랐던 정보를 일반회원들이 알기는 어렵다. 질본이 진실한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질본은 지난 8일 노인 인플루엔자 3차 지침변경안을 마련해 대체백신을 한시적으로 허용하고 긴급백신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긴급’ 백신을 추가로 투입하고 11일까지 병·의원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대체 백신을 사용하도록 한 것. 그런데도 논란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김 씨는 “부랴부랴 추가로 긴급백신 신청을 200개를 했는데도 한 30~40개만 줬다”고 말했다. A 씨는 “긴급백신도 주지 않고 있다. 또 일선 의원들은 수입품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체를 하고 나중에 관납된 백신을 받으면 그 백신을 일반 국민들한테 다시 맞춰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백신 부족 현상이 일어나자 질병관리본부는 ‘예방접종도우미’ 홈페이지 통해 각 지역의 병·의원의 백신 보유량을 실시간으로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홈페이지는 백신 보유량의 정확한 숫자를 반영하지 못할뿐더러 같은 지역 안에서도 편중이 극심한 상황이다. 예를 들어 서울 도봉구의 K 의원의 백신 보유량은 89개, B 내과 의원은 백신 보유량이 달랑 1개에 불과한 식이다. 경기도 지역 E 내과의 한 간호사는 “어젯밤 이후로 백신이 전부 소진이 됐다. 신청수량보다 적게 나와 그렇다. 다시 추가로 신청을 했는데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다”고 전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