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 들고 ‘사면’ 받고 그들이 다시 온다
▲ 오는 10월 재보선에 출사표를 던진 여야 거물급 3인방의 행보에 정치권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왼쪽부터 홍사덕 전 한나라당 원내총무(경기 광주), 이상수 전 의원(경기 부천 원미갑), 이강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대구 동을). | ||
정국의 또 다른 변수가 될 10·26 재·보선 구도가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던 여야의 중량급 인사들이 잇달아 출사표를 던지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현재까지 재·보선 실시가 확정된 지역은 15일 대법원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 의원직을 상실한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 동 을을 비롯, 경기도 광주와 부천 원미 갑 등 모두 세 곳.
이들 지역 출마 예상자 중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인물은 열린우리당측에서 이상수 전 의원과 이강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한나라당에선 홍사덕 전 의원 등 세 명. 3인 모두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한 시절을 풍미했던 여야의 핵심인사들이다. 그만큼 이들의 원내 진입 도전은 양당 내에 풍성한 화젯거리를 낳고 있는 상황이다.
먼저 5선 관록에 국회 부의장(2000년 6월~2001년 6월)과 2004년 3·12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 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를 지냈던 홍 전 의원은 공천 문제가 이미 당내 현안으로 떠오른 상태. 지난 9월15일 경기도 광주에 공천신청장을 낸 홍 전 의원은 당내에서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공천 불가론’이 대두되면서 ‘탄핵 논란’을 재연시키고 있다.
홍 전 의원의 정치 복귀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외형상 탄핵사태에 대한 한나라당의 입장 정리 문제다. 홍 전 의원이 최병렬 전 대표와 함께 탄핵을 주도했고, 한나라당이 그에 따른 ‘후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자칫 ‘궤멸’당할 위기에 처했던 만큼, 만약 홍 전 의원을 경기도 광주 재선거에 공천할 경우 한나라당이 탄핵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논리다.
당내 소장파들의 리더인 원희룡 최고의원이 “왜 우리의 아픈 과거인 탄핵의 당사자를 재·보선에 내세우려 하느냐. 탄핵을 잊고 싶고 떨쳐내려고 노력하는데 왜 리마인드시키려고 하느냐. 홍 전 의원의 공천은 안 된다. 잘못하면 재·보선이 정치선거가 될 수 있고, 이럴 경우 한나라당에게 이로울 게 없다”며 공개적으로 반대의견을 표명하고 나선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반면 홍 전 의원측은 “정당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고, 탄핵에서 잘못한 것은 없으나 이를 문제 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홍 전 의원이 수도권에서 당선되면 당에 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는 입장이다. 홍 전 의원측은 구체적으로 한나라당이 이달 중순 실시한 경기 광주지역 자체 여론조사에서 당내 출마예상자 중 홍 전 의원의 경쟁력이 가장 높게 나타난 점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중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당내에 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는 ‘불가론’에도 불구하고 홍 전 의원이 이른바 ‘병풍(屛風)론’을 내세워 박근혜 대표 주변에 대한 설득작업에 들어갔다는 점. 병풍론이란 이번 재선거에서 당선될 경우 6선으로 당내 최다선이 되는 홍 전 의원이 향후 박 대표의 대선 레이스에서 당 안팎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홍 전 의원의 한 측근은 “대권을 놓고 이명박 서울시장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박 대표로선 당내에서 자신을 지근거리에서 도와 줄 ‘어른’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홍 전 의원을 공천할 경우 단기적으론 탄핵의 공과를 둘러싼 논란이 제기되는 등 부작용이 없지 않겠지만, 장기적으론 정연한 논리에다 나름대로 당 내외 기반이 있는 홍 전 의원이 힘을 보탤 경우 박 대표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특히 홍 전 의원이 2002년 서울시장 후보 공천을 놓고 이 시장과 격돌했던 ‘전력’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박 대표가 이 시장의 도전을 제압하기 위해선 홍 전 의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여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홍 전 의원이 내세우는 ‘병풍론’에 대해 박 대표 측근들의 반응은 차갑다. 특히 공천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김무성 사무총장측은 홍 전 의원이 다시 부상하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김 총장이 원희룡 최고위원 등이 주장하는 ‘홍사덕 불가론’에 대해 “무슨 뜻의 얘기인지 알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의 선거 분위기이고 또한 당은 공천심사위원회를 통해 공정하게 한치의 불공정 시비도 일어나지 않도록 절차에 따라서 처리하겠다”며 동조하는 듯한 입장을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 당내의 분석이다.
한나라당에서 홍 전 의원의 공천 여부가 ‘핫 이슈’라면 열린우리당에선 이상수 전 의원과 이강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의 행보가 주목의 대상이다. 노무현 정권 탄생의 ‘1등 공신’인 두 사람이 재·보선 공간을 통해 다시 당내에 둥지를 틀 경우 당내 역학구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민주당 선대위 총무본부장을 지내면서 불법 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돼 5개월여간 옥고를 치른 바 있는 이 전 의원은 8·15 광복절에 사면되기 전부터 경기도 부천 원미 갑 지역 재선거에 대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이 전 의원은 9월15일 당 공천심사위원회로부터 “당에 대한 기여도 등을 감안해”(문석호 위원장) 경기도 부천 원미 갑 공천장을 받은 상태다.
당내에서는 부천 원미 갑이 경기도 내에서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해 이 전 의원이 재선거에 나설 경우 당선 전망이 그다지 어둡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 지역에서 4선을 한 안동선 전 의원이 민주당 간판으로 나올 경우 호남표가 양분될 것이란 우려에다, 사면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재선거에 나서는 데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지만 “노 대통령을 대신해 옥살이를 했다”는 동정론에다 높은 지명도 등이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근거에서다.
여권 관계자들은 이 전 의원이 재선거란 ‘관문’을 통과해 정치 일선에 화려하게 컴백할 경우 당내 권력질서에 ‘의미 있는 변화’가 있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이 13대 국회에서 노 대통령, 이해찬 총리와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릴 만큼 여권 수뇌부와 각별한 관계인 데다 당내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대선 기여도가 높다는 점, 집권여당의 원내총무-사무총장을 역임한 관록을 지닌 만큼 원내에 재진입할 경우 친노(親盧) 그룹의 새로운 중심이 되리라는 예상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 전 의원이 지역구(서울 중랑 갑)를 물려 준 이화영 의원이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의원 등 친노 386측근들과 함께 의정연구센터를 결성, 당 내외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상수 역할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이 수석과 가까운 열린우리당 한 의원은 “이 수석은 시민사회수석에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나 같은 사람에겐 체질적으로 청와대 근무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토로하곤 했다. 술자리 등에서 격의 없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이 수석으로선 빡빡하고 틀에 짜인 청와대 근무에 갑갑함을 느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선거에 나서겠다고 결심한 데는 ‘대구에서 반드시 금배지를 달아 지역구도 타파에 기여하겠다’는 본인의 자존심도 작용했겠지만, 청와대에서 ‘탈출’하기 위한 기회로 설정한 면도 적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수석은 9월 들어 2일 박병원 재정경제부 차관 등 정부 부처 고위 관계자들을 대동한 채 대구를 방문해 지역 상공인들 간담회를 갖는 등 이미 재선거 출마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는 것이 당내외의 시각이다.
한나라당이 이 수석의 대구 간담회를 두고 “우리나라에 총리와 부총리 사이에 막강 ‘소(小)총리’가 하나 탄생한 것 같다”(김무성 사무총장)며 ‘사전 선거운동’이라 공세에 나섰지만, 이미 재선거에 나서겠다는 뜻을 굳힌 이 수석은 “정당한 업무수행”이라며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다.
여권 내에선 대구·경북권의 ‘좌장’인 이 수석이 재선거 당락 여부를 떠나 열린우리당으로 ‘롤백’할 경우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이 결집될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특히 그동안 당내 영남그룹의 중추가 되리라 기대를 모았던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이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해 왔다는 평가가 일반적인 만큼 이 수석이 영남권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최근 노 대통령이 당 내외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연정 제안을 내놓는 등 지역구도 해소를 위해 계속 드라이브를 걸 것이 분명한 만큼 이 수석의 당내 행동반경도 그만큼 커질 것이란 분석이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