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하곤 못살아’…누가 먼저 ‘집’ 나갈까
서울 신천동에 위치한 국민연금공단 송파사옥. 일요신문DB
500조 원의 국민연금 기금을 굴려 보장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는 임무를 맡은 최광 이사장과 홍완선 본부장은 그동안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공사화 등 지배구조 개편안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안에 대해 이견을 보여 왔다. 기금 운용과 관련해서는 방향성과 보고 체계 등에서도 충돌해왔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 이사장과 홍 본부장이 겪는 갈등의 배경에는 상이한 정치 인맥과 학맥이 작용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홍 본부장은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대구고 동기이며, 최 부총리가 새누리당 원내대표였던 지난 2013년 당시 기금운용본부장에 임명됐다. 반면 최 이사장은 현 정부 초대 비서실장인 허태열 전 실장과 부산고 동문이다. 그는 김영삼 정부 당시 복지부 장관을 지냈으며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에 있었다.
갈등의 첫 쟁점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공사화였다. 복지부는 지난 7월 국민연금공단에서 기금운용본부를 떼어내 특수법인 형태로 공사화하겠다는 국민연금 기금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이는 최경환 부총리가 앞장서 추진한 사안이다. 최 부총리는 이전부터 기금의 독립성, 책임성, 전문성 강화를 위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를 별도 기구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수법인 형태는 공공기관 운용에 관한 법률(공운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공공기관의 모습을 띠게 된다. 예산이나 인사, 월급체계 등에서 정부부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다른 공공기관에 비해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 이사장이 신중한 입장을 내비친 반면 홍 본부장은 찬성 입장을 보여 왔다. 최 이사장은 최근 국감에서도 기금운용본부의 공사화는 반대하지 않지만 국민연금의 제도와 기금이 같이 있어야 한다며 독립에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최광 이사장,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
홍 본부장은 지난 5일 국민연금공단 전주 본사에서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민연금공단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결정 이전에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만난 적이 있느냐는 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7월 7일 이 부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최 이사장은 이때까지 해당 사실을 보고받지 못했는데 석 달이 지난 후 국정감사장에서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일일이 만남을 나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지만 대단히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봤다”며 “굳이 만나려면 투자 결정이 다 완료되고 나서 만났어야 하는데 투자 결정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왜 만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됐다. 설령 만나서 특별한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왜 굳이 만나서 국민연금이 오해를 사야하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선 여러 정황상 홍완선 본부장이 이재용 부회장을 만나기 전 충분히 보고했지만 최광 이사장이 거짓 해명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국감 일주일 후 최 이사장은 홍 본부장의 연임 불가 결정을 내렸다. 최 이사장은 “모든 공공기관의 상임이사 임기는 2년간의 실적을 평가해서 1년 더 할지를 결정하게 돼 있다. 이 권한은 전적으로 기관장에게 부여돼 있다”며 “홍 본부장에 대한 비연임 결정은 그동안의 실적이나 관리능력, 경영철학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연임은 어렵겠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개인적 감정에 따른 결정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비연임 결정이 국민연금법에 따른 정당한 인사권 행사라는 입장이다.
정진엽 복지부 장관은 최 이사장을 두고 “홍 본부장과 오래도록 갈등을 겪었으니 기관장에게 책임이 있다”며 공공연히 사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정 장관은 지난 20일 저녁 최 이사장과 만나 “홍 본부장에 대한 비연임 결정이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문제와 관련해 본인의 입장을 조속히 표명해달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최 이사장의 자진사퇴가 예상됐지만 최 이사장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사퇴를 하느냐”며 “사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최 이사장이 사퇴한다면 홍 본부장 역시 사퇴할 가능성이 높다. 22일 정 장관은 “최 이사장뿐만 아니라 홍 본부장도 자진사퇴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두 인물의 사퇴 여부는 향후 국민연금공단의 고질적인 문제인 기금운용본부 독립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최 이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쉽게 물러나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독립이 급물살을 타 국민연금 기금이 위험에 처할 수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 이사장이 정부 정책에 역행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최 이사장과 홍 본부장, 복지부 사이의 갈등이 계속 이어지면서 23일 개최 예정이던 국민연금 기금운영위원회 회의는 무기한 연기됐다. 국민연금공단 내부 갈등이 국민의 노후보장 자금인 국민연금 기금 500조 원의 운용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는 피할 수 없게 됐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