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지고 갈아타고 “그 라인 웃기네”
현재 구도의 개그계 파벌 형성은 박준형이 박승대로부터 독립하면서 시작됐다. 독립한 박준형이 갈갈이 라인의 맹주가 돼 KBS <개그콘서트>(개콘)를 이끌기 시작했고 박승대는 대학로 소극장을 중심으로 신인들을 모아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의 개국공신이 되면서 맹주의 위용을 되찾았다. 그리고 컬투가 <웃찾사>에 합류해 독자적인 세력의 맹주가 됐다. 이것이 개그 프로그램이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며 호황기를 누리던 2005년 당시 개그계를 삼분한 3대 파벌이었다.
3대 파벌이 적절한 세력 균형을 이루는 안정적 상황에서 개그계는 호황을 주도했지만 거듭되는 호황이 오히려 그늘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개그 프로그램이 꾸준히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면서 스타로 발돋움하는 개그맨이 급증했고 대학로 소극장 개그 공연에도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MBC가 <개그야>를 신설하면서 개그맨들의 설 자리도 넓어졌다.
이런 계속된 호황은 조금씩 판도 변화를 불러왔다. 가요계 최대 세력인 SM엔터테인먼트(SM)가 표인봉을 맹주로 내세워 개그계로 진출해 판도 변화를 시도했고, 박승대는 스타로 발돋움한 소속 개그맨들과 노예계약 파문에 휩싸이는 위기를 겪어야 했다. 개그계에 뿌리내리는 데 실패한 신생 맹주 SM의 표인봉은 개그계를 떠났고 최대 맹주였던 박승대 역시 본인이 대표로 있던 스마일엔터테인먼트(스마일)를 정리하고 야인생활에 돌입했다. 이후 개그계는 다양한 연예기획사가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했다.
개그 프로그램 가운데 과거의 영광을 유일하게 이어가고 있는 곳은 <개콘>이다. 꾸준히 20% 전후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는 <개콘>은 오랜 기간 박준형이 이끄는 갈갈이 라인이 ‘장악’해왔다. <개콘>은 KBS 공채 개그맨 위주로 운영돼 왔는데, 이는 갈갈이 라인이 대부분 KBS 공채 개그맨 출신인 데다 맹주 박준형과 정종철이 워낙 높은 인기를 자랑하며 프로그램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7년 동안 <개콘>을 이끌어온 박준형과 정종철은 지난 2008년 초 전격적으로 <개그야>로 이적했다. 여전히 갈갈이 라인 소속 개그맨들이 상당수 <개콘>에 출연하고 있지만 맹주가 <개그야>로 떠나면서 갈갈이 라인은 <개콘> 최대 파벌의 위상을 잃었다.
그 자리를 대신해 현재 <개콘>을 이끄는 최대 파벌의 맹주는 김병만이다. BM엔터테인먼트 소속 개그맨을 중심으로 한 김병만 라인은 <개콘>에서 가장 큰 파벌을 형성하고 있는데 류담 김재욱 이동윤 노우진 이상호 이상민 한민관 송준근 허미영 등이 소속돼 있다. 가장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김병만을 중심으로 소속 개그맨들도 인기 코너에 등장해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는 것. 다만 BM엔터테인먼트 외에도 갈갈이패밀리 탑엔터테인먼트 코엔스타즈 등 다양한 연예기획사 소속 개그맨들이 <개콘>에 출연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 갈갈이 라인이 <개콘>을 완전히 장악했던 당시와 달리 김병만 라인은 최대 파벌일 뿐 독점 파벌은 아니다.
<개콘> 내부의 파벌 변화는 김병만의 급성장이 결정적 원인이지만 아무래도 갈갈이 라인의 맹주 박준형이 정종철 등 갈갈이 라인의 대표주자들과 함께 <개그야>로 이적한 것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렇다면 갈갈이 라인이 <개그야>에서 최대 파벌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을까?
과거 방송국은 철저히 공채 시스템에 의해 돌아갔다. 방송국마다 탤런트와 개그맨(코미디언) 공채를 실시했고 여기서 선발된 이들은 해당 방송사에서 주로 활동했다. 물론 요즘 연예인들은 출신 방송국과 무관하게 프로그램에 따라 다양한 방송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탤런트의 경우 공채 시험이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개그맨 역시 비슷한 양상이나 여전히 각 방송사 공채 시험이 대표적인 개그맨 등용문이다. 예전부터 각 방송사 희극인실은 선후배 사이의 기강이 확실하고 유대 관계도 탄탄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KBS 희극인실이 유명했는데 <개콘>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의 존재도 큰 힘이 됐다. 간혹 특채 출신이 몇몇 활동하지만 여전히 <개콘> 출연진의 상당수는 KBS 공채 개그맨들이다. 그런데 <개콘> 역시 요즘에는 희극인실 중심이 아닌 각 소속사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다. 공채 개그맨의 경우 모두 희극인실 소속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개그맨이 별도의 연예기획사에 소속되면서 역학구도에 변화가 생긴 것. 게다가 몇 해 전 벌어진 희극인실 내부 선후배 사이의 구타 사건도 결정적이었다.
반면 최근 가장 확실한 결속력을 보이고 있는 곳은 MBC 희극인실이다. 그러다 보니 <개그야> 최대 파벌은 MBC 공채 개그맨들이다. MBC 개그맨 공채 8기인 고명환과 9기 정성호를 중심으로 한 공채 개그맨들이 다양한 외부 세력에 맞서 탄탄한 결속력을 중심으로 삼아 최대 파벌을 이룬 것. KBS <개그야>와 SBS <웃찾사>가 개그계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MBC는 공채 개그맨을 중심으로 한 기존 형식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유지해왔다. 그러다 뒤늦게 <개그야>를 신설하면서 박준형 정종철 등 갈갈이 라인 개그맨을 대거 영입했고 컬투 라인 개그맨도 합류했다. <개콘> 녹화장 대기실 역시 갈갈이 라인과 컬투 라인, 그리고 기존 공채 개그맨 중심으로 나눠져 있다. 물론 박준형 정종철 등 영입 개그맨들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면 갈갈이 라인과 같은 영입 파벌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테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내부 결속력을 다져 놓은 공채 개그맨들이 최대 파벌을 형성하고 있다.
SBS <웃찾사>는 현재 폭풍 전야다. 본래 <웃찾사>는 박승대 라인의 영향력이 막강했지만 그가 대표로 있던 스마일을 해체하고 떠나면서 최대 파벌 자리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스마일에서 분화한 형엔터테인먼트(형)와 이엔티팩토리(이엔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컬투 라인 역시 <웃찾사>에서 오랜 기간 터를 닦고 있는 파벌로 근래에는 최대 파벌의 위치까지 올라섰다. 컬투 라인의 맹주인 컬투가 <웃찾사>로 돌아와 직접 출연하기 시작한 게 직접적 계기가 된 것.
그런데 최근 컬투가 <웃찾사>에서 하차하고 박승대가 기획 작가로 투입되면서 새로운 파벌 구도가 형성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현재 박승대는 과거처럼 소속 개그맨을 이끈 최대 파벌 맹주가 아닌 기획 작가로 <웃찾사>에 합류했다.
이로서 과거 박승대 라인에서 분화한 형과 이엔티가 최대 파벌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항간에선 두 회사가 박승대를 중심으로 합쳐질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신 박승대가 기존 개그맨이 아닌 신인 개그맨 중심의 새로운 파벌을 형성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게 희극인실 주변의 관측.
SBS는 박승대를 기획 작가로 영입하기에 앞서 지난 2월 공채 9기 개그맨을 선발했다. 당시 박승대는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박승대가 공채 9기 개그맨을 집중 조련해 <웃찾사> 시즌2의 중심으로 발돋움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새로운 파벌의 맹주로 우뚝 설 수도 있다. 박승대는 이미 박준형 정종철 등 소속 개그맨들과 <개콘> 전성기를 이끌다 결별한 뒤 SBS로 자리를 옮겨 신인 개그맨들을 조련해 <웃찾사> 열풍을 주도한 바 있다. 결국 과거 최대 맹주 박승대가 그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는 여건은 어느 정도 준비된 셈.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든 개그계가 박승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