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는 은행이 치고 책임은 고객이 지고…
그러나 사람들의 이런 시각에는 일종의 착시가 끼어있다. 최근 신학용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년간 은행 직원들의 위법행위 등으로 발생한 금융사고 금액은 1조 3248억 원에 달했다.
여기서 말하는 ‘금융사고’란 은행 직원들이 고객의 예금을 유용하거나, 은행의 회계·전산 오류, 정산 실수 등으로 예금을 공중분해한 경우를 말한다. 금융사고 금액을 연으로 환산하면 2650억 원, 일평균 7억 2500만 원이었다. 지난 5년간 연평균 62조 원의 신규 예금이 쌓였으니, 신규 예금의 0.5% 정도는 사고에 노출됐다. 매출액 기준으로 봤을 때 중견기업이 1년에 하나씩 날아간 셈이다.
이런 금융사고 금액을 범죄 피해와 비교해 보면 어떨까. 지난해 절도 범죄로 발생한 피해금액은 총 6080억 원. 하루 평균 16억 6600만 원의 선량한 사람들 재산이 범죄자에게로 넘어갔다. 이 피해액은 은행 금융사고 피해액의 2배에 불과하다. 물론 이 두 통계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은행의 도덕성이나 안전관리가 일반적인 기대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은행에서 금융사고가 발생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고객의 신뢰 때문이다. 특히 큰 규모의 돈을 맡기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지난 2010년 서울의 한 시중은행 지점에서 일하던 부지점장 박 아무개 씨는 고객으로부터 돈을 꾼 뒤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난해 검찰에 기소됐다.
당시 박 씨는 VIP센터에서 근무하며 수백억 원대 자산가인 고객 김 아무개 씨와 가까워졌는데, 어느 날 급전이 필요해지자 1주일 뒤에 갚겠다며 돈을 꿔달라고 했다. 김 씨는 박 씨가 은행원이고, 오랜 기간 친분을 쌓았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2억 5000만 원을 성큼 빌려줬다. 박 씨는 김 씨의 신뢰를 저버리고 돈을 갚지 않고 버티다 결국 사법부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지난 2013년과 2014년 연이어 터진 국민은행 도쿄지점의 배임 사고와 KT ENS 대출사기 등도 앞서의 사례처럼 은행과 고객 간에 막연한 신뢰관계가 만들어낸 ‘막장 드라마’다. 은행이 제 아무리 도덕적이고 보수적이라고 해도, 사람이 모여 형성된 조직. 공익보다는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배임·횡령·사기 사고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최근 또 다른 은행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성접대’ 논란도 있었다. 여성 A 팀장이 PB사업부의 후배 여직원 B 씨에게 VIP 고객을 소개해주겠다고 꼬드겨 잠자리를 갖게 한 사건이다. A 팀장은 수백억 원대의 자산을 보유한 사립대학 재단 관계자 C 씨와의 술자리에 B 씨를 불러, C 씨와 미리 짜고 B 씨에게 과도하게 술을 먹여 결국 C 씨와의 동침을 유도했다. 이에 B 씨는 A 팀장이 실적을 위해 자신의 신체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며, 성폭행 혐의로 A 팀장과 C 씨를 경찰에 고발했다. 이 사건은 고객 돈을 유용하거나 횡령한 사례는 아니지만 은행(직원)이 사익을 위해서 얼마나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고객은 이런 금융사고에 크게 관심이 없다. 은행에서 불법대출로 수천억 원대의 부실이 발생하고, 수백억 원의 비리·횡령 사고가 터져도 예금주의 돈은 안전하기 때문이다. 예금자보호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를 떠나, 실제로 은행이 금융사고로 망하기 전까지는 내 예금에서 손실이 발생할 일은 없다.
앞서 소개한 여러 횡령과 사고로 발생한 피해액은 고객 개인이 아닌, 충당 부채의 형태로 은행 전체의 손실로 계산된다. 이는 은행이 재무적으로 충당해야 할 돈이라 적립충당금이나 이익잉여금으로 손실을 채워 넣으면 그만이다. 결국 아무리 큰 사고가 발생해도 고객은 땡전 한 푼 책임질 일이 없다.
그렇다고 정말 고객에게는 손실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모든 은행 고객들이 그 피해금액을 함께 지고 있어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을 뿐이다. 각종 사건·사고로 은행의 충당부채가 늘어났다는 것은 곧 은행의 대출 금리가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행은 각종 사고로 발생한 피해 금액을 충당금에서 정리하는데, 재무적 판단에 따라 충당금이 부족하면 사고금액을 쪼개 이월시키고, 충분하다면 한 번에 털어내곤 한다. 돌발 사고가 충당금을 까먹는 탓에 이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은행들은 대출금리 상한선을 올리는 방식으로 이익을 충당하려 한다. 은행의 대출금리는 코픽스·은행채 발행 등을 통한 조달자금의 금리에 영업·운영·인건비 등과 같은 각종 판매관리비용, 여러 사고발생에 대비한 대손충당금 적립비율(NPL) 등을 고려해 산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은행들은 금융회사에서 발생한 사고의 책임을 전체 고객으로 돌리는 셈이다. 금융당국 역시 금융사고를 일으킨 은행에 강한 징계를 내렸다가, 더 큰 피해와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해, 해당 직원과 관리자를 인사조치 내리는 수준에서 상황이 정리되길 바란다.
금융사고가 아무리 많이 일어나도 당장 내 통장에는 피해가 없으며, 예금자보호법이 모든 사고를 막아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다수의 침묵이 사회의 부도덕을 용서하듯, 많은 고객의 침묵이 은행의 신뢰라는 허상을 지지해주고 있는 셈이다.
김서광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