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쪽도 가해자 쪽도 “진실을 알고 싶어요”
배우 이상희 씨가 아들의 비보를 접하고부터 메모를 해 놓은 수첩을 꺼내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해당 학교에서 이 군은 이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두 살 아래의 A 군(당시 17)과 평소 친하게 어울려 지냈다. A 군 역시 미국에 유학 온 지 7개월 된 평범한 학생이었다. 사건 발생 며칠 전, 둘 사이에 형 동생 호칭을 두고 다투는 일이 생겼다. 나이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와 그 반대인 현지 문화가 뒤엉켜 발생한 갈등이었다.
그런데 이 갈등은 지난 2010년 12월 14일, 이 군과 A 군의 주먹다짐으로 번지게 된다. 현재 당시 정황을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는 LA경찰청의 조사 결과다.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군은 이날 체육시간인 오후 1시 35분께 A 군과 말다툼을 하다 몸을 던지며 달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A 군은 이 군의 왼쪽, 오른쪽 뺨을 주먹으로 각각 한 대씩 때렸고, 발로 복부를 한 차례 걷어찼다. 그리고 10여 초 뒤, 근처에 있던 교사가 둘을 떼어놓은 순간 이 군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911을 부르고 교사가 응급처치를 하는 내내 이 군은 의식이 없었다. 인근 병원을 거쳐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출발한 이상희 씨 부부가 해당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 군은 뇌사판정을 받은 후였다. 당시 담당 의사는 이상희 씨에게 “이 군이 병원에 있을 때 이미 숨진 상태였다. 단 1%의 가능성도 없다는 전문의 두 명의 판단에 수술도 하지 못했다. 부모가 멀리서 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호흡기와 기계 등을 통해 혈액을 순환시켰다. 아직 이 군이 차갑게 식진 않았지만 이미 숨진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 군의 미국 사체부검보고서.
충격에 빠진 이상희 씨 부부는 말문이 막혔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벌어져 있었고, 누구 하나 이 일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여기에 ‘장기기증’ 서류 두 장이 나타났다. 머리카락과 얼굴을 제외한 뼈, 힘줄, 피부 등 모든 장기 및 신체를 기증한다는 내용이었다. 현지 언론과 한국 언론 등은 이를 두고 “뇌사 상태에 빠진 유학생이 장기기증으로 8명에게 새 삶을 주게 됐다”고 대서특필했다. 이상희 씨는 “LA에서는 장기기증을 하면 곧바로 화장해야하는데, 상식적으로 경찰 조사와 부검이 이뤄지기도 전에 기증을 하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당시엔 몰랐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미국 현지에 살던 지인이 장기기증 브로커와 함께 병원 측에 장기기증을 제안한 것을 알았다. 그것도 수수료가 10만 달러나 됐다고 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 씨 부부는 이 군이 있던 병실 문을 걸어 잠그고 이틀을 버텼다. 그리고 이 군이 숨진 지 3일째 되는 날인 지난 2010년 12월 17일, 부부는 장기기증을 취소하고 경찰에 시신을 인계했다.
이 군의 미국 부검결과서를 보면 머리에 둔탁한 타격으로 대뇌출혈이 있었으며, 이는 싸움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나타났다. 정확한 사인은 외상에 의한 뇌지주막하출혈이었다. 현지 경찰은 최초 폭행죄로 A 군을 체포했다가 이 군이 숨지자 ‘살인’으로 혐의를 변경하고 조사했다. A 군은 경찰 조사에서 “이 군이 먼저 주먹질을 했고, 체육시간이니 싸우더라도 나중에 싸우자고 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이 군을 밀어내기 위해 발로 걷어차고 주먹으로 두 대 때렸다”고 진술했다.
이 씨 부부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10여 초 동안 단 3대의 폭행만으로 벌어진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상희 씨는 “진실을 밝히고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이 씨 부부는 ‘진실’에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했다. 지난 2011년 3월 스스로 변호를 자청했던 김 아무개 LA총영사가 대리인을 통해 ‘알아보겠다’는 영문 메일만 보내오더니, 1년 뒤 돌연 ‘경제성이 없다’는 취지로 계약 취소를 통보했다.
여기에 지난해 미국에서 선임한 두 번째 변호사를 통해 “지난 2011년 5월 LA경찰이 A 군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정당방위로 판단해 증거불충분 등으로 A 군을 불기소 처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년원에서 복역 중일 것으로 알았던 A 군이 한국에 돌아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 씨 부부는 두 번째 변호사의 제안대로 즉시 A 군과 부모, 어학원 등에 민사 소송을 제기해 재판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지난 2014년 1월 24일 이 씨 부부는 “아직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며 청주지방법원에 A 군에 대한 재수사를 요청했다. 검찰은 “이 군이 직접 구타로 숨졌는지 알아야 한다”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해 지난해 9월 안장됐던 이 군의 시신을 다시 부검했다. 그리고 해당 결과를 국과수, 대한의사협회 등에 분석을 요청했고, 미국 부검 자료도 넘겨받아 조사했다. 하지만 이후 사건담당 검사가 계속 바뀌는 등 수사는 진전되지 않았다.
부검 이후 이상희 씨의 부인 이 씨는 A 군의 아버지가 담임 목사로 있는 청주의 한 교회 앞으로 관을 들고 찾아가 65일 동안 시위를 벌였다. 이후엔 검찰에 기소를 촉구하기 위해 “진실을 밝혀달라”며 서울중앙지검 앞을 찾아 지난 9월까지 300여 일 동안 이 군이 잠들어 있었던 관 앞을 떠나지 않았다.
현재 그 관은 사라진 상태다. 청주지검은 지난 9월 1일 A 씨를 ‘폭행치사’ 혐의로 불구속기소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한 검찰 관계자는 “미국은 총기 소유가 합법화돼 있어 비교적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편이지만 국내법은 정당방위 판단이 다르다. 한국은 정당방위를 ‘침해행위에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침해행위가 저지되거나 종료된 뒤 폭력행위를 하지 않았는가’를 중점으로 판단한다”며 “정당방위는 본인 위험을 막는 것에 한정된다. 한쪽 폭행이 끝난 다음 폭행으로 대응하는 것은 정당방위로 인정하기 힘들다. A 군 사례를 우리나라에선 ‘과잉방위’로 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검찰은 부검 결과에서 새롭게 찾아낸 이 군의 사망 원인을 공소장에 추가했다. “복부를 1~2회 걷어차여 복강신경총 심장억제반사로 인한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했다”는 내용이다. A 군의 폭행이 이 군의 사망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검찰의 판단이다. 이에 따라 검찰은 폭행치사로 A 군을 불구속 기소했다.
지난 11월 12일, 청주지방법원에서 A 군의 ‘폭행치사’에 대한 2차 공판이 열렸다. 이날 A 군 변호인은 “당시 피해자가 욕설을 하며 달려들어 소극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면서 “A 군의 폭행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아니라 피해자 이 군이 평소 갖고 있던 지병이 사망의 근본적인 원인일 수도 있다”고 정당방위와 무죄를 주장했다. 이 가운데 이 군에 지병이 있었다는 주장은 이번 공판에서 처음 나온 것인데 변호인이 과연 어떤 근거를 제시할지 관심이 쏠린다.
다음 재판은 오는 12월 10일 피고인 신문과 함께 진행된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이상희 씨 인터뷰 건강하던 아들이 두세 대 맞고 어떻게…“미국 수사당국 판단 납득불가” “단 한 가지 이유다. ‘진실’을 알고 싶다.” 지난 16일 기자를 만난 이상희 씨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대답했다. 든든했던 장남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가족들의 삶은 지난 2010년에 멈춰 있었다. 그는 “단순히 ‘사내놈들이 싸웠고, 한 명이 죽었는데 그것이 정당방위냐, 아니냐’를 가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내 아들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은 것인지에 대한 진실을 낱낱이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이 군 모친이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모습. 그가 5년간 이어온 ‘진실 규명’은 “건강하던 아들이 단 두 세 대를 맞고 죽음까지 이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상희 씨는 비보를 접한 이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 미국에 날아간 순간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언어차이에 의한 병원과 경찰 측과의 명확한 의사소통 실패, 당시 변호사의 불성실한 태도, 장기기증 브로커 등이 그것이었다. 이상희 씨는 당시 미국 수사 과정에서도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는 “아들의 사인이 ‘둔탁한 충격에 의한’ 지주막하출혈로 알려져 있지만, 소견서에는 정확히 ‘Stick(둔기류)에 의한’으로 나와 있다. ‘정당방위’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 미국 수사당국의 판단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 한국에서 어학원 원장은 전화통화에서 ‘백인 럭비 선수 등에게 맞아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다”며 당시 미국 경찰 수사 내용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상희 씨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이 씨는 전재산을 털어 아들 이 군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 군은 아버지에게 종종 전화를 걸어 “아버지 고생하시는 거 잘 알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최대한 빨리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상희 씨는 아내에 대한 걱정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아이가 그렇게 된 이후 아내가 모든 일에 직접 나섰다. 변호사를 만나 수사기관에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해 9월에는 A 군의 아버지가 담임목사로 있는 교회 앞에 찾아가 65일 동안 1인 시위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교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아직도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그들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덧붙였다. 이상희 씨는 지난 1980년부터 연극 무대에 올랐다. 영화 <도가니> <이웃사람> <추격자>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선·후배들의 만류에도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연극에 담아내고 있다. 직접 연출과 극작을 맡았다. 이상희 씨는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작품으로 풀어내고 있다”며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다”고 말했다. [문] |
A군 아버지 인터뷰 수사 방해·증거 인멸·폭행 사주라니…“억울해도 침묵하는 이유 있다” “그 누구도 사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다.” 지난 17일, <일요신문>을 만난 A 군의 아버지 B 씨는 이렇게 운을 뗐다. 그는 청주에 위치한 한 교회의 담임 목사다. 이상희 씨의 이야기가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A 군의 아버지는 ‘정·재계에 손이 닿는 대형교회 목사’ ‘돈이 많은 뻔뻔스러운 악당’ 등으로 알려져 었다. 일부 게시물을 보면 그는 LA총영사에게 손을 뻗어 수사를 방해했고, 증거를 인멸했으며, 교인들을 시켜 이 씨 아내를 폭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만 원의 합의금으로 이 군의 죽음을 무마하려 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A 군이 숨진 이 군에게 남긴 사죄의 편지. 이에 대해 한동안 말이 없던 B 씨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는 “교회 간사나 교인들이 ‘SNS에 이런 이야기가 올라온다’며 해당 글들을 봤다. 모두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B 씨는 “총영사를 알 만한 인맥도 없었고, 미국 수사당국을 매수할 돈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운 형편에 아이를 유학 보냈다. 해당 학교도 평소 알고 지내던 목사가 ‘미션 스쿨’이라며 저렴하게 유학할 수 있다고 소개해 보냈다. 해당 학교는 한적한 시골에 있는 작은 학교다. 다른 곳은 비용 때문에 보낼 수가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무혐의로 풀려난 A 군이 한국에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는 말에 대해서도 “잘못 알려졌다”고 말했다. A 군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 적응하지 못했고, 대안학교를 다니다 검정고시를 치렀다. 대학엔 지난해 입학했다고 한다. B 씨는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힘들다. 휴학을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전했다. 교인이 이 군 어머니를 폭행한 사실에 대해서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답했다. B 씨는 “이 군 어머니가 ‘새벽 4시’에 교인 4명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는데, 깜짝 놀라 직접 교인들을 대상으로 확인해 보니 그 시간에 교회에 온 것은 80대 노인 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 군 어머니가 교회 앞에 걸어둔 플래카드에는 폭행당한 시간이 ‘새벽 6시 30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경찰 신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군 어머니가 교회에 처음 온 날 비가 많이 내려 관에 교회에 있던 천막을 쳐줬다. 음식도 가져다주고, 교인들도 걱정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이 씨 어머니의 욕설이 담긴 전화와 문자였다”고 말했다. B 씨는 사실과 다르게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누구도 사실 관계를 파악하려 하지도 않았고, 이 군 어머니의 이야기를 실은 신문과 방송국 중 단 한 곳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전화도 없었다.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그는 “하루는 이 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그래도 당신 아들은 살아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그 얘길 듣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B 씨는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아들을 잃은 상처에 비하면 내가 받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도 재판을 제외한 어떤 것에도 대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 ‘진실’은 이곳에도 있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