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환경미화원인 줄…’이런 회장님 본 적 있소?
무네쓰구 도쿠지가 거대 체인으로 키워낸 <코코이찌방야> 일본 내 점포 모습.
무네쓰구 씨는 일본인들에게 ‘존경받는 경영인’이자 동시에 ‘괴짜’로 불린다. 한 지인은 “언제나 무네쓰구는 ‘자수성가해 모은 막대한 자산을 어떻게 사회에 환원할까’ 그 생각만 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나고야시 거리에 피는 수천 송이의 꽃과 나무도 그가 심은 것이다. 또 최근에는 초·중학교 100여 곳에 수십억 원의 악기를 기부한 사실이 알려졌다.
일본 매체 <비즈니스저널>에 따르면, 1948년생인 무네쓰구 씨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아동양호시설, 이른바 고아원에서 자랐다. 낳아주신 부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세 살 때 잡화점을 운영하던 무네쓰구 부부에게 입양되었으나 양아버지가 도박에 빠져 있던 터라 참 지독히도 가난했다. 리어카에 식기와 이불, 교과서만 싣고 야반도주한 적도 몇 번이나 된다.
가난에 쪼들려 따뜻한 밥 한 공기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너무 배가 고플 때는 풀을 뜯어먹으며 굶주림을 견뎠다. 그러던 중 양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고등학생이었던 무네쓰구는 아침저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고교 졸업 후 부동산개발회사에 입사, 3년 뒤인 1970년에는 주택건설 기업인 다이와 하우스 나고야지점으로 전직한다. 이곳에서 만난 나오미 씨와 결혼하는데, 이 만남이 무네쓰구 씨의 인생을 갈랐다.
두 사람은 결혼과 함께 창업을 결심하고 부동산중개업소를 개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경기 영향을 쉽게 받는 업종이라 현금 수입이 있는 부업이 절실했다. 1974년 어쩔 수 없이 찻집 ‘박카스’를 시작한 것이 뜻밖에도 천직이었다. 부부는 곧바로 부동산중개업을 접고, 찻집 운영에만 전력을 다했다. 매상에 한계가 보이면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 배달 서비스를 하는 아이디어로 한계치를 넘어섰다. 어느새 박카스는 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는 점포가 되어 있었다.
박카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나오미 씨가 만든 카레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1978년 나고야시 교외에 카레전문점 <코코이찌방야> 1호점을 낸다. “생글생글 웃고, 활기차게 일하고, 시원시원하게 대답한다”라는 문구를 간판에 새기고, 철저히 고객 관리를 했다. 무네쓰구 씨가 생각하는 장사의 기본은 ‘일찍 일어나기’와 ‘청소’ 그리고 ‘웃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벤처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고독한 인생이었다. 그래서 장사로 돈을 번다기보다 먼저 손님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즉, 가난과 고객 제일주의가 그를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던 셈이다.
비록 대인관계에 서툴지만 아이디어가 풍부한 무네쓰구 씨가 사업계획을, 활발한 성격의 아내 나오미 씨가 사원교육과 자금사정을 맡아 일을 분담했다. 특히 무네쓰구 씨는 밥의 양과 카레의 매운 정도, 토핑까지 고객이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는 독특한 주문방식으로 차별화를 뒀다.
여기에 ‘블룸시스템(Bloom System)’을 도입하면서 사업은 급격히 성장했다. 직원들의 최고 동기부여는 자기 가게를 갖는 것이라는 점에 착안해 5년 동안 본점에서 일을 한 후에 가게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구상했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물론 로열티는 일절 받지 않았다.
1987년 점포수는 80개를 넘어섰다. 점포가 확대돼도 무네쓰구 씨의 일에 대한 열정은 녹슬지 않아 아침 4시에는 어김없이 기상. 고객 설문지 1000통 이상을 읽고, 가게 내부는 물론 주변까지도 스스로 청소했다. 일 년 중 쉬는 날이 고작 15일 정도였다. 1998년에는 점포수가 500개에 달하는 등 사업은 그야말로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전 세계로 점포가 확산되던 2002년. 무네쓰구 씨는 53세의 나이로 전격 퇴임을 단행한다. 이유는 후계자가 충분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19세에 아르바이트로 입사해 부사장 자리까지 오른 하마지마 도시야 씨를 사장으로 승격시키고, 자신은 조용히 일선에서 물러났다.
<주간플래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려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아들은 프로골퍼가 됐지만, 정작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고 전했다. 하지만 고생 끝에 키워낸 회사다. 혹 아쉬움은 없었을까. 이에 무네쓰구 씨는 “애착은 있으나 온힘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미련이 남지 않는다. 물러날 때가 되어 물러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은퇴한 후에는 각종 지원과 기부 사업을 통해 사회공헌에 매진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인 이유로 진학할 수 없는 음악가 지망생 후원에 열심이다. 2007년에는 사비 270억 원을 투자해 나고야시에 클래식 음악홀을 설립, 누구나 쉽게 클래식을 접할 수 있도록 꾸몄다. 여기에는 극빈했던 자신의 고교시절, 바이올린협주곡을 듣고 감동했던 사연이 숨어 있다고.
보통 사람의 경우 가난에 대한 반발심으로 “부자가 되고 싶다”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 등의 절실한 마음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돈을 쫓으면 반드시 실패한다”고 강조한다.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전력투구하는 것. 그런 다음 사회에서 번 돈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더욱이 지난 11월 2일에는 “소유하고 있는 회사 주식을 모두 매각한다”고 밝혔다. 이번 매각으로 회사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그 배경에 대해 무네쓰구 씨는 “국내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라 해외에서 승부할 수밖에 없다. 주식공개매입(TOB)을 한 하우스식품이 그 뒷바라지를 전적으로 하겠다는 것이어서 장기적으로 회사에 도움이 되는 얘기였기에 매각을 망설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제 ‘괴짜 기업가’는 사업 대신에 “음악과 꽃으로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주식 매각으로 얻은 자금은 재단을 만들어 사회공헌 활동에 힘쓸 예정이다. 이와 관련 <비즈니스저널>은 “무네쓰구는 일본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이색 기업인”이라고 평가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