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통당’ 있는 한 ‘DJ당’도 건재해야
▲ 지난 8일 정세균 당의장(왼쪽) 등 열린우리당 비상집행위원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을 예방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결론부터 말하면 DJ의 메시지는 하나,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통합하라’이다. DJ의 복심(腹心)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 의원은 “극도로 말을 아끼는 DJ의 화법에 미뤄볼 때 이는 지나가는 제안이 아니라 ‘강권적 주문’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DJ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그림은 무엇일까.
2003년 8월 DJ, “분당은 정도가 아니다”
정치 입문부터 청와대 재직까지 ‘DJ 정치’를 전수받은 한 소장 정치인의 말.
“열린우리당이 신당을 차리기 위해 분주했던 지난 2003년 여름 내가 소속돼 있던 민주당 내 소장개혁파 의원 모임인 ‘새벽21’에서 대부분의 의원들이 신당행을 주장하고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을 찾아가 의견을 구했더니이렇게 말했다. ‘정치를 하더라도 이 당 저 당 철새처럼 찾아다니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눈앞의 이익을 찾아 당을 옮겨다니면 당장 국회의원 한두 번은 더 할지 모르나 길게 보면 그것은 정치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다.’”
이 정치인은 결국 신당행을 포기했다. 그는 “그러나 DJ에게는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이나 똑 같은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 있는 게 확실하다”고 했다. 즉 찢어진 게 바람직한 게 아니었던 만큼 이제는 통합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게 DJ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DJ의 진의(眞意)를 찾아라
지난 8일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이 DJ를 방문해 ‘정치적 계승’ 발언을 듣고 난 뒤부터 DJ에 대한 정치권의 면담 요청이 줄을 잇고 있다. 먼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14일 김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틀 뒤인 16일엔 민주당 한화갑 대표가 동교동을 찾는다. 이들 여야 정치 지도자들 이외에도 일반 정객들의 ‘동교동 면담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동교동측의 한 측근은 “지금 신청한 면담 요청을 다 들어주면 김 전 대통령은 다른 업무를 일체 볼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아마도 정세균 의장이 동교동 방문 때 들었던 ‘여러분이 나의 정치적 계승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호남 민중들은 안다
정치에 조금만 민감한 사람이라면, 특히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인 호남 시민들은 DJ 말의 속뜻이 뭔지 금세 알아차린다.
한화갑 대표가 지난 10일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과의 통합을 요구하더라도 통합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는데 이를 놓고 온라인·오프라인에서 한 대표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고 있다. 당 내에서 ‘한 대표 퇴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은 물론, 민주당 지지자들의 ‘인터넷 요새’랄 수 있는 남프라이즈(www.namprise.com)도 한 대표를 공격하는 글들로 가득 찼다.
민주당 내 한 개혁성향의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통합하라고 해도 통합은 불가하다는 발언이 ‘이제 DJ까지 무시한다’는 반발을 낳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상현 전 의원도 한 대표의 발언에 대해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DJ의 메시지는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하다. 전남 여수 출신 열린우리당 주승용 의원은 “전통적 지지표를 복원하라”는 DJ의 말은 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주 의원에 따르면 DJ의 지적은 정확하고 아주 과학적인 분석이며 DJ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이렇게 확실하게 언급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는 결코 덕담 수준이 아니라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통합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10·26 재선거 패배 이후 다시 제기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과의 합당 주장을 필두로 한 ‘통합론’은 여당 내 상당수 의원들의 공감을 얻어 온 게 사실이다. 단순히 찬반 주장에서 나아가 구체적 구도 등도 거론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DJ의 말은 통합론의 불에 기름을 부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럼 DJ는 왜 그토록 통합을 바라고 있는가. DJ의 한 ‘복심’의 말은 이와 관련한 궁금증의 일부를 해소해주고 있다.
“지금 한 쪽엔 과거 산업화가 지상목표였던 ‘박정희당’(한나라당을 지칭)이 엄존하고 있다. 이제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추진세력의 당이 다른 한 쪽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박정희당’의 존재가 엄연한 하나의 현실이라면 이에 마주한 ‘김대중당’의 존재 또한 ‘숙명’이란 얘기다. 이런 인식 뒤에는 이른바 민주개혁진영이 재선거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강한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그 통합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과정과 방법론이다. DJ가 한 대표를 동교동으로 부른 것은 이와 관련 있는 것 같다. 16일 DJ와 한 대표의 면담은 따지고 보면 DJ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 동교동측은 “지난번 DJ가 폐렴증상으로 연세대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찾아오겠다는 한 대표의 요청을 거절한 데 대한 미안함 때문에 이번에 부르게 됐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은 작금의 정치상황과 관련한 내밀한 ‘지도지침’이 주어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물론 상황이 녹록지만은 않다.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 내에 통합에 완강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상당하고, 일각에서는 ‘지역주의로의 회귀’ 비판도 들린다. 하지만 한국 정치에서 여전히 영향력 1위를 차지하는 인물 중 하나가 DJ이다. 민주화 개혁세력의 정당이 유지·발전하느냐 또는 퇴보·사멸하느냐의 갈림길에서 그가 택할 옵션은 많지 않아 보인다.
DJ의 한 최측근 인사는 “난 통합에 반대해 왔지만 DJ가 (통합을) 선택하면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DJ는 이미 통합을 선택했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들이 언제 ‘절멸’(絶滅)할지도 모르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더 이상 덕담만 늘어놓기엔 상황이 한가하지 않다는 뜻이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