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과 공간만 달라졌을 뿐, 난 혁명가다”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 씨가 <다시 강철로 살아>라는 회고록을 출간하고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민감한 내용이 많아 고통스러웠지만 북한 인권을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일요신문>과는 3년 만이다. 2013년 6월 중국에서 추방된 이후 현지 활동은 어렵겠다.
“중국에는 전혀 못 들어간다. 현재는 북한 인권과 관련해 강연을 다니거나 교육 및 저작 활동을 꾀하고 있다. 이따금 해외 출장도 있는데, 2주 전에는 독일에서 순회강연을 진행했다.”
―회고록을 출간했다. 민감한 내용이 많아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 주변의 권유는 많았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우리 활동과 관련해 북한 내부 감옥이나 수용소에 수감된 분들도 계시고 희생된 분들도 있다. 이러한 활동을 글로 옮기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또 우리 활동이 자랑할 성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활동 방식과 연계망이 노출될 여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안 쓰려고 했다.”
―그럼에도 결단한 이유는.
“북한 문제와 인권에 대한 관심이 기대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관심 있는 분들도 상당수는 순수한 목적보단 국내정치와 연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분들에겐 진심과 열정을 찾기 어려웠다.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책 출간이 여기에 기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1년 전에 출간하려 했지만, 앞서의 고민 탓에 쓰다 말다를 반복하다 이제야 내게 됐다.”
―진보진영의 비판 중 하나는 ‘보수에서 북한 인권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용하는 사람들 많다. 그런 사람들하곤 같이 안 가면된다. 무슨 문젠가. 인권문제 자체는 중요한 가치다. 진보진영에 아쉬운 점이다. 인권은 진보적 가치다. 북한인권 현실에 대한 조사와 천명, 문제가 있다면 개선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는 등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진보진영은) 아무런 입장이 없다. 아직 ‘북한은 금기’라는 80년대 사고방식에 갇혀있다. 이해할 수 없다.”
―특히 회고록을 통해 유시민, 심상정, 노회찬 등 현실정치에 속한 진보정치인들에 대해 아쉬움을 피력했다.
“그 분들과 아직 만날 기회가 없었다. 개인적으론 그 분들과 만나서 이에 대해 얘기 한 번 하고 싶다.”
―1998년 전향 이후 중국을 오가며 북한민주화활동을 하고 있다. 조심스럽지만 묻겠다. 15년 남짓한 활동 기간 동안 북한 내부에 지하당을 구축했다는 것인가.
“그렇다.”
―정례화 된 소통이 오갈 수 있는 수준인가.
“그 정도 수준의 조직망은 (북한 내부에) 갖췄다.”
―북한 내부의 활동가들은 어떻게 선발하나.
“(접촉이 가능한 중국에서 만나) 토론을 하다보면 열정 있는 친구들이 있다. 일단 기본적인 교육수준과 지식수준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 순수한 열정과 의지, 인내심, 사회적 활동 능력을 일단 본다. 이 과정을 통해 내부에서 국가안전보위부의 추적을 따돌려 지하당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갖췄으면 우리와 함께 한다. 물론 단순히 북한 내부소식을 간헐적으로 전해주는 분들도 있다. 다양하다.”
―성과가 있었나.
“당연하다. 오래 활동했으니까. 다만 우리 기량만큼은 아니다. 지하활동이란 것이 어렵다. 5~6년 넘은 베테랑들도 간헐적으로 공포감이 밀려온다. 후퇴하는 경우도 있고, 탄압의 감시망에 걸려 앞서 말했듯 희생된 분들도 있다.”
―북한 내부의 지식인들이 지하조직의 주축이란 것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출신 성분이 좋은 재목들인데 이미 중앙정치에 진출하거나 관계하는 인원들도 있다는 것인가.
“거기까진 답변하기 어렵다. 다만 북한 내부에서 높은 집 자제들과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가장 큰 어려움이 뭔가.
“감시와 추적을 피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다. 이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활동가들도 마찬가지다. 중국 공안은 물론 북한에서 납치나 암살을 위해 파견한 요원들도 있다. 그들은 한국 활동가들도 건드린다. 어차피 북한 요원들은 그 한국 사람이 국정원 사람인지, NGO활동가인지, 종교인지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는 납치 사례도 꾀 있다.”
―한국인 활동가들의 중국 현지 활동도 상당히 힘들겠다.
“그들에겐 한 달에 중국 돈 2500위안(원화 45만원)이 지급된다. 이마저도 생활비로 다 쓰는 게 아니다. 기본 판공비가 없다. 500위안 정도는 아예 활동비로 들어간다.”
―활동하는 동안 북한의 변화를 느끼나.
“당연하다. 폭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핵심은 시장이다. 이미 북한의 국영기업은 정상기능을 못한다. 국가 주도 대형사업 조차 민간시장이 주도한다. 김정은 스스로 투자자들의 자본 출처를 묻지 말라고 까지 한다. 이제 북한 전체를 시장이 떠받치고 있다.”
―김정은 등장 전후해 비교한다면.
“그것보단 김정일이 쓰러진 2008년을 전후해 변화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김정은이 통치에 나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장 중심의 정책이 적극 타진되기 시작했다. 다만 국경의 통제는 더 심해졌다. 통제가 심해지면서 활동가들이 국경을 오가기 힘들어졌다. 뇌물 시세도 많이 올랐다. 우리 활동에 영향이 있다.”
중국에 강제 구금됐다가 114일 만에 석방된 김영환 씨가 2012년 7월 25일 기자회견을 가졌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지난 2012년 중국 안전부(한국의 국정원)에 의해 검거됐다 114일 만에 추방됐다. 북한이 연계됐다고 보는가.
“확실하진 않다. 중국 안전부는 내게 오히려 ‘북한 보위부가 당신의 동료 중 한 명을 추적해 납치하려했는데, 사전에 우리가 알고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검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중국 안전부와 북한 보위부 사이에 선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보위부가 안전부에 추적 및 검거를 부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3년 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제1057호)에선 추방 이후 중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 사법 차원에서 대응하겠다고 했는데, 이후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북한의 압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측면을 고려했다. 현재는 그 뜻을 완전히 접었다.”
―본인의 중국 강제구금을 전후해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 사태가 터졌다. 민혁당 시절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과의 인연이 있다.
“당시 우리 지하조직은 단선․점조직 형태였다. 이 전 의원은 핵심간부였고, 내가 총책이었으니 그를 잘 안다. 매주 이 전 의원으로부터 활동사안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당시 이 전 의원을 비롯한 경기동부 세력의 성향과 인식은.
“(나와 함께했던) 당시만 해도 그들이 독자적으로 뭔가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들은 이론을 만들 수도, 다른 사람의 이론을 포장할 능력도 없었다. 처음부터 행동파와 가까웠다. 다만 그 때만해도 우리와 결합하면 궁합이 잘 맞겠다 싶었고, 실제 이석기도 그렇고 나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회피한 적도 없다. 말을 잘 들었다. 다만 내가 전향한 1998년을 전후해 하영옥(경기동부의 핵심으로 통진당 내란음모 사건이 터졌을 때, 일부 보수 세력들은 하영옥을 그 배후로 지목했었다. 물론 본인은 몇몇 언론을 통해 평범한 학원 강사로서의 삶을 전하며 그 의혹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이 나와 함께 전향했으면 이석기가 어떻게 나갔을지는 모르겠다.”
―하영옥이 통진당 배후세력이란 일부 보수세력의 주장에 대해선.
“아니다. 내가 당시 핵심이었으니까 잘 안다. 현재 그는 은퇴한 것이 확실하다. 어떤 이유에서 그가 (경기동부에서) 떨어져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하영옥의 행동이나 언행은 지하 운동을 하는 사람의 그것과는 다르다.”
민혁당 시절 김영환 씨가 총책이었고 이석기 전 의원은 핵심간부였다. 지난해 2월 3일 수원지법에서 열린 이석기 등 내란음모 사건 결심공판. 사진공동취재단
―통진당 잔존세력의 재 세력화 가능성은.
“이석기 그룹은 이제 구심점이 없다. 이석기가 워낙 강력했기에 그 잔향도 오래 간다. 새로운 구심점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고, 잔존 세력들이 합의하기도 어렵다. 전례를 비춰보면 핵심이 날아간 이상 재정비는 쉽지 않다. 북한 역시 이제 완전히 노출된 통진당과 이석기 그룹은 활용가치가 없어졌다.”
―1998년 민혁당 사건 당시 자수하면서, 국정원에 협조를 대가로 ‘민혁당 구성원들을 기소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물론 국정원은 이 약속을 깼지만.
“이미 민혁당 해산 전에도, 구성원들을 상대로 (전향과 개혁의) 노력을 다했다. 해산 이후에도 적극 노력했다. 하지만 사건이 딱 터지고 나서 내 입지가 줄었다. 구성원들이 내 얘기를 안 들었다. 만약 당시 국정원이 내 조건을 들어줬다면, 오히려 통진당 내란음모 사건과 같은 극단적인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노력이 무산된 것은 아쉬움이 크다.”
―공교롭게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책을 출간했다. 정치권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닌가. NL계열의 전향인사 중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이미 제도권에 들어왔고, 그밖에도 내년 총선 제도권 진입을 노리는 전향 인사들이 꽤 있다.
“난 그런 생각은 없다. 출마를 생각했다면 벌써 지역구 활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료들이) 제도권에 진입하는 것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북한 민주화와 인권을 대변하는 사람은 분명 필요하니까 말이다.”
―전향인사인 본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보수인가 진보인가.
“난 혁명가다. 그 대상과 공간만 달라졌을 뿐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