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없었지만 폭력보다 무서웠다
은평구 수색 4지구 재개발 현장에서 일부 주민들이 조합측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왼쪽 사진은 최근 자살한 세입자가 살던 집안 내부.
경의선 수색역 일대의 모습은 ‘극과 극’이다. 경의선을 사이에 두고 상암동에는 여러 방송사들과 대형 빌딩들이 빼곡히 들어서 늦은 저녁 시간에도 활기가 가득했다. 반면 길 건너 반대편 수색동 주변은 가파른 언덕길과 철거를 기다리고 있는 낡은 건물들로 인해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겼다.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일체 건축행위가 중단됐고, 부동산거래도 멈췄기 때문이다. 실제로 갈등의 중심인 ‘수색4구역’ 골목에 들어서자 싸늘한 기운까지 감돌았다. 창문이 모두 뜯어져 나가 있는 낡은 주택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고 ‘무단출입 금지’ ‘경찰 특별순찰구역’ 등의 경고문이 집집마다 붙어 있었다.
‘수색4재정비촉진구역’은 주택재개발정비사업(정비기반시설이 열악하고 노후·불량건축물이 밀집한 지역에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시행하는 사업) 대상지로 6만 3231㎡ 규모의 공동주택 15개 동, 1076가구와 각종 부대시설이 들어설 계획이다. 특히 이 구역은 지난 9월부터 시작된 주민 이주가 현금청산대상자를 제외하고 약 80%가량 진행됐다. 현재 수색역 일대에서 주택재개발사업 속도가 가장 빠르다.
사업 진행 속도가 빠른 것은 주민 간 원만한 합의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해당 사업 추진 과정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합 측의 무리한 이주 독촉과 각종 편법이 드러나면서, 소송전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조합 측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주민들은 이주를 하지 않고 남아있는 일부 현금청산대상자다. 이들은 “조합이 손실 보상은 제대로 하지 않고 명도 소송을 걸고 있다”며 “철거용역 등을 동원해 강제 이주 독촉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재개발·재건축에 있어 현금청산자들은 분양 받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토지나 주택 등을 현금으로 청산하길 원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조합과 현금청산자들은 손실보상 등을 통해 사전 협의를 해 원만한 합의가 이뤄지면 조합은 청산금을 지급하고, 현금청산자는 토지와 건물을 조합에 넘겨주면 된다. 만약 협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조합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의한 강제수용절차에 따라 청산을 하고 토지, 건물 등의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런데 수색4구역 조합 측은 ‘사전 협의’ 단계인 손실 보상에서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해당 구역 주민들에게 대대적인 명도 소송을 제기해 토지와 건물 등을 인도하라고 나섰다. 주거이전비와 동산이전비, 이주정착금 등에 대한 손실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토지와 건물에 대한 보상이 이뤄졌다는 이유로 명도 소송을 제기한 것.
이에 대해 현재 조합 측과 소송 중인 A 씨 측 변호사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제49조 제6항을 보면 ‘손실보상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명도소송을 제기하거나 이주독촉을 할 수 없다’고 나와 있다. 손실 보상에는 토지·건물에 대한 보상뿐만 아니라, 이주정착금, 주거이전비, 동산이전비도 포함돼 있다. 이들 보상이 모두 이뤄져야 명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며 “하지만 제대로 된 보상 절차를 완료하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하게 명도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이 열릴 즈음에 조합이 자체적으로 토지·건물에 대해 감정 평가한 금액을 공탁하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재판과 동시에 사업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이런 편법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에 따르면 전국 대부분의 재개발 현장에서 앞서의 ‘편법’ 사업 진행이 관행처럼 굳어있다고 했다.
김성모 재개발 전문 변호사는 “낡은 주택에 적은 월세를 내고 살고 있는 세입자들에게 일부 조합 측이 철거용역을 동원해 위압감을 조성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운을 뗐다. 그는 “다만 과거와 같이 폭력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지는 않는다. 대신 ‘(세입자가) 이주하지 않아 재개발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 지연될수록 사업비가 매달 늘어난다.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하며 15억~20억 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면 일반 세입자들은 버틸 수가 없다. 조합 측은 소송을 취하하는 대신 ‘정해진 기한까지 이주하겠다’는 각서를 받는다”며 “세입자 입장에선 폭행·협박만큼 두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또 “앞서의 현금청산대상자 관련 명도 소송의 경우처럼 일부 재개발 현장 조합들은 토지·건물에 대한 손실보상만 해주고 ‘보상은 모두 완료됐다. 나머지 손실 보상은 행정소송을 통해 받으라’는 편법을 쓰고 있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관련 증명 서류 등을 직접 현금청산대상자가 준비해야 한다. 발생하는 비용과 역시 이주해야 하는 주민들이 부담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행정법원에 따르면 부동산가격 급등시기였던 지난 2006년 서울시내에서 제기된 현금청산 청구소송이 단 1건도 없었지만, 2012년에는 16건으로 늘어났다. 전국적으론 2006년 4건에서 2012년 32건으로 8배 증가했다. 지난해에도 상반기에만 30건이 넘는 소송이 접수됐다.
앞서의 김 변호사는 “최근 재개발 현장에서 벌어지는 앞서와 같은 상황들에 대해 제도의 개선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며 “조합 측이 법리적인 절차에 따라 반드시 토지·건물 보상뿐만 아니라 주거이전비 등 손실 보상을 사전에 마치고 명도 소송을 하도록 법률적으로 못 박아야 한다. 관할 지자체에도 행정적인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