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사건에 대한 보도가 담긴 <동아일보>의 1969년 12월 12일자 신문이다.
시계를 잠시 46년 전 오늘로 돌려보자. 1969년 12월 11일 오후 12시 25분경, 강원도 강릉공항에서 대한항공 YS-11기 항공기가 서울을 향해 이륙했다. 항공기 안에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총 51명이 타고 있었다. 그 날 역시 언제나 있었던 민항기 운행과 다를 바 없었고, 항공기는 순조롭게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사건이 터졌다. 이륙한지 14분 만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당시 항공기 위치는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의 상공을 지나치고 있다. 그 때, 누군가에 의해 항공기가 통제되기 시작했다. 서울로 향하던 항공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후 1시 18분경, 항공기가 이륙한 지 약 1시간 만에 도착한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다름아닌 휴전선 넘어 북한 원산의 비행장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중 한 명이 하이재킹(운송수단의 불법적 납치)을 감행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난리가 났다. 그 정확한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건발생 후 약 30시간 뒤인 12월 13일 새벽녘 북한의 <평양방송>에서 당시 사건에 대한 공식입장이 나왔다. 북의 주장은 조종사 두 명이 자진 입북하여 항공기가 북으로 흘러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누구도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이는 없었다. 12월 22일, 국제연합(UN)은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를 통해 북에 ‘납북된 사람들과 여객기 기체를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북은 이를 단칼에 거부했다. 우리 정부는 울며겨자 먹기로 일본의 적십자사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북은 이러한 노력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12개국 주요 항공사가 북의 하이재킹에 대해 규탄 성명을 내는 등 국제사회의 여론이 북을 서서히 압박했다. 결국 북은 해를 넘긴 1970년 2월 5일 전원 송환을 약속했다. 하지만 북은 당시 약속을 엎고, 승무원 네 명과 승객 여덟 명을 제외한 39명만을 남으로 송환 시켰다. 2월 14일 판문점에서의 일이다. 사건 자체자 이렇게 종결됐다.
문제는 당시 우리 정부의 사건에 대한 조작 수사 의혹이 일었다는 것. 사건 발발 직후 우리 내무부 치안국은 당시 항공기 탑승 승객 중 한 명인 ‘채연덕’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당시 강릉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채현덕은 애초 간첩이었고, 또 다른 승객 조창희와 부조종사 최석만을 현혹해 여객기를 납북시켰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치안국이 제시한 사건 설명은 아무런 증거도 없었고, 그저 추정 수준에 불과했다. 치안국 발표 직후 대한항공 측은 치안국 수사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불복했다. 진실은 3개월 뒤, 승객들 일부가 남으로 송환되면서 밝혀졌다. 당시 승객들의 주장은 조창희란 인물이 진짜 범인이라고 지목했다. 조창희는 당시 ‘한창기’라는 가명으로 국내 잡입해 활동하던 고정 간첩이었고, 조종사에 무력을 사용해 북으로 조종판을 돌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결국 치안국의 당시 사건에 대한 최초 수사 발표는 모두 ‘거짓’이고, 완벽한 ‘소설’로 들어났고, 이에 대한 야당의 공세는 계속됐다.
한편, 당시 납북됐다 북에 남은 승무원 성경희는 지난 2001년 제3차 이산가족 방북단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평양에서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마나며 눈물을 쏟았다. 북이 당시 왜 승무원 전원과 일부 승객들을 송환하지 않았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